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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60] 인위(人爲)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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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670회   작성일Date 23-04-3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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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 이외의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누군가가 ‘일부러’ 해서 남긴 것들이다. 문명은 근본적으로 인위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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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060
    2022. 0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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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입니다. 매주 월요일 철학자 최진석의 글과 (사)새말새몸짓의 소식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헌 말 헌 몸짓에서 새 말 새 몸짓으로 나아가자는 저희들의 외침이 한 단계 더 성숙한 '나', 더 상승하는 '우리'가 되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이번 주 소개해 드릴 글은 <인위(人爲) 예찬>이란 글입니다. 몇일 전 중앙일보에서 발표된 칼럼인데요. 도가철학 전공자로서 무위가 아닌 인위를 강조하고 급기야 예찬하고 있는 점이 생경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평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등의 기본을 향한 그의 물음을 떠올려 보면, 철학자 최진석이 그리는 시선은 분명해지리라 믿습니다. 그럼, 아래에서 확인해보세요.  

    • 이번 한 주도 늘 한 걸음 더 나은 삶으로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인위(人爲) 예찬

     

      

     도가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알려진 내가 인위를 조금 좋게 대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예찬까지 하니 많이 놀라실 것이다. 놀라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십중팔구는 나를 잘못된 사람이거나 뭘 모르는 사람으로 비웃기 쉽다. 우리 주변에는 문명을 비판적으로 보고, ‘인위’를 부정적으로 대하며, 삶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일부러’ 하는 악착같은 태도를 하찮게 봐야 인간적인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분명히 존재한다.


     ‘정치적 동물’ ‘이성적 동물’ ‘도구를 쓰는 동물’ 등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내용이 솟아나는 밑바닥에는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한다. 자연 속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만나도 그것을 예술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거기에는 인간이 일부러 하는 동작이 들어있지 않다. 예술은 일부러 만들려고 애를 쓰는 인간의 인위적인 손길이 닿고서야 겨우 나온다. 예술적 영감도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


     일부러 만들려고 애쓰는 정도가 한계를 넘으면서 선물처럼 온다. 그래서 나는 손을 놓고 영감이 자연스럽게 오기를 기다리는 한가한 예술가는 믿지 않는다. 예술의 경지에 이르려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일부러’ 부단히 무언가를 만드는 지친 예술가를 믿는다. 인간은 ‘일부러’하는 존재로 이 별에 왔다.


     문명은 ‘생각’의 결과다. 물건, 제도 심지어는 생각마저도 생각이 만든다. 생각은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들락거리는 의식에 ‘일부러’ 방향성을 부여하고 결을 만드는 인위적인 활동이다. 의식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벼린 의식을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연 이외의 것은 하나도 예외 없이 다 누군가가 ‘일부러’ 해서 남긴 것들이다. 문명은 근본적으로 인위의 힘으로 축조됨을 알 수 있다.

     

     인위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인간적인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내용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보통 노자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오해다. 노자는 ‘인위’가 아니라 ‘유위’(有爲)를 비판하거나 부정했을 뿐이다. ‘일부러’ 하는 인위성을 부정해야 인간의 고도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노자를 인위성을 부정하는 철학자로 만들어버린다. ‘무위’의 철학자로 알려진 노자는 ‘뒤로 물러나거나’ ‘사적인 의욕을 버릴’ 것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 제7장에는 “자신을 뒤로 물러나게 하면, 자신이 오히려 앞선다” “사적인 의욕을 버리면, 오히려 사적인 의욕을 이룰 수 있다”고 쓰여 있다.


     노자의 시선은 자신을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앞서게 되는 결과를 향한다. 노자는 사적인 의욕을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사적인 의욕을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앞서게 된다’거나 ‘사적인 의욕을 채울 수 있다’는 결론은 애써 읽지 않고, ‘뒤로 물러나’거나 ‘사적인 의욕을 버리’는 것만 읽는 경향이 있다. 노자는 ‘무위’(無爲)보다는 ‘무불위’(無不爲)에 목적을 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그렇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노자가 그렇게 써 놓았다. “무위하면 되지 않을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도덕경』 제48장)


     무위는 모든 인위적인 일이 완성되는 조건이라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노자는 세상사 인위적인 ‘모든 일을 이뤄지게 하는’(無不爲) 방법으로서 ‘무위’를 주장하였지, 그냥 자체의 가치 때문에 ‘무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무불위’의 최종 목적지는 ‘천하를 차지’(取天下)하는 것이었다. 노자는 천하 경영이라는 야망의 곁에 있었던 사람이다.


     퇴행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지식보다는 지혜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지식을 무시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오해한다. 인위적인 노력과 그 노력의 결과로 오는 선물을 착각하면 이렇게 된다. 지식을 쌓는 인위적인 노력을 부단히 하면, 자신이 가진 야망의 강도에 따라, 어느 순간 선물처럼 오는 것이 지혜다. 지식이 지혜로 바뀌는 순간에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계기는 야망의 강도나 순도다. 진실하고 강한 야망의 인도를 받아 지식이 생산력과 적응력을 발휘하면 지혜가 된다.


     우리는 그저 야망을 품고 지식 섭취라는 인위적인 활동을 꾸준히 ‘일부러’ 하면 된다. 이런 인위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지식과 지혜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 유지되어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다. 야망도 없고, 지식을 쌓는 인위적인 활동도 없으면, 지혜도 없다. 이현주 목사가 번역한 도교 경전 『화호경』 제5장에 이렇게 나온다. “한 번 고요해지면 저절로 펼쳐지고, 마침내 끝없이 넓어져서, 헤아릴 수 없는 밤하늘처럼 된다.” 우리는 고요를 지키기 위해서 고요해지려는 것이 아니다. 펼쳐지고 넓어져서, 헤아릴 수 없이 풍요로운 밤하늘을 갖는 이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고요에 이르려는 인위적인 동작을 ‘일부러’ 단련하고 또 단련하면, 자연스러운 밤하늘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위가 자연을 초대하고, 결국 탄성 있는 일체를 이룬다.


    최진석, 〈인위(人爲)예찬>, 《중앙일보》, 2022년 0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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