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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09] 인문적 시선의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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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276회   작성일Date 23-08-21 10:23

    본문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시선으로 새롭게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쌓은 부와 명성의 수준을 한 단계 상승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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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09
    2023. 07. 03.

    안녕하세요? 새말새몸짓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인문학의 시선, 철학적 시선'에 관한 것입니다. 이 글은 『탁월한 사유의 시선』 초반부에 수록되어 있는 글인데요, 우리 사회 및 국가 공동체가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기를 바라는 철학자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다양한 삶의 몸짓이 우리 사회에 가득해지는 날을 꿈꿔봅니다.  이번 한 주도 새말새몸짓으로, 늘 한 걸음 더 나은 삶으로 건너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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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철학은 살아 있는 '활동'이고 '사유'다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이야말로 나와 사회를 한 단계 더 상승시킬 수 있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안목의 높이만큼만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법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철학도들이 철학을 더 심층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 유학을 떠날 때, 그들이 향하는 나라들이 어딘가? 대부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중국 등이다. 이런 나라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지금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강한 국가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독일 철학, 영국 철학, 프랑스 철학, 미국 철학, 중국 철학의 내용이 각각 다른데 어떻게 이런 나라들이 모두 똑같이 높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라고 따지듯이 묻는 분들도 있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철학은 그 ‘내용’ 자체로 규정된다기보다는, ‘사유’즉 살아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각각 다른 내용의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철학적인 높이의 사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통상 우리는 어떤 하나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이론 체계나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만 묻고 따지는데,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야 각기 다르더라도 그런 내용을 산출하는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에서 나라마다 각기 다른 내용의 전략을 사용하더라도 전략을 행사할 수 있는 동일한 높이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전략적 높이를 행사해본 적이 없이 그저 전술적 차원에서만 살아본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여기서 ‘내용’이 전술이라면, ‘시선’은 전략이다.

     

    프랑스 철학과 영국 철학의 내용적인 특징은 다르다. 이론 체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철학이 모두 각기 다른 이론 틀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런 철학 이론을 산출할 수 있는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프랑스나 영국 사람들이 동등하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본적으로 그들 모두 철학적인 수준에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적 차원에서 사유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비유하면, 전략적 차원에서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한층 더 높은 곳에서 내려본다는 뜻이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의 움직임에 종속적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말은 곧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은 수입한 그 생각의 노선을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의 종속은 가치관뿐 아니라 산업까지도 포함해 삶 전체의 종속을 야기한다. 생각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수출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들을 수용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어려워져버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들은 잘 숙지하면서, 스스로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중략)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을 수입하며 살았다. 능동적이거나 주체적이라기보다 종속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우리가 쌓은 경제적인 부도 결국은 큰 틀에서 보면 종속적인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한다면, 지나친 자기 비하일까? 그러나 자기 비하라는 부정적인 느낌이 들더라도 사태를 정확히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만 이 부정적인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는, 당당한 삶을 꾸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여기서 종속적인 시선이란 다름 아닌 따라하는 시선이나 훈고하는 시선이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히 ‘따라하기’나 훈고를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나쁘다고만 할 수 없다. ‘따라하기’를 해야 결국에는 따라잡을 수 있게 되고, 두터운 훈고가 있어야 비로소 창의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까지 ‘따라하기’와 훈고에 더 집중하다 보니, 그것들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다가, 앞서려 덤비거나 창의를 발휘하려는 의지 자체가 줄어든 것이다. 선도(先導)나 창의에 대한 절실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또 창의를 발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것을 일상의 범위를 벗어난 아주 생소한 활동으로 치부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지금까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이런 유형의 시선으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딱 여기까지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우리가 이제껏 가지고 살았던 시선의 높이로는 이룰 수 있는 최상위 단계에 이미 도달했으니, 이제 후퇴냐 아니면 한 단계 더 높은 발전을 향한 도전이냐 하는 기로 말이다.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시선으로 새롭게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쌓은 부와 명성의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키란 매우 어렵다.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정치적인 문제까지도 모두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지금과는 전혀 다르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그 시선이 인문적 시선이고 철학적 시선이고 문화적 시선이며 예술적 시선이다. 이 높이에서는 기능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도전할 수 있다. 이 차원의 시선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야만 ‘따라하기’가 선도하기로 바뀌고, 훈고의 습관이 창의의 기풍으로 바뀔 수 있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21세기북스, 2018[2017], 30~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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