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의 좁은 시각에 갇혀 스스로 힘을 기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다가 외국의 힘을 빌려 나라를 살려놓으면, 새말새몸짓 레터 #154
2024. 5. 13. |
안녕하세요? 새말새몸짓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징비록』에 관한 것입니다. '책읽고건너가기'의 10번째 책으로 선정되었던 유성룡의 『징비록』. 이번주에는 이 책에 대한 철학자 최진석의 독후감으로 가져왔습니다.
이번 한 주도 새 말 새 몸짓으로 힘차게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돈키호테’, ‘노인과 바다’, ‘데미안’, ‘페스트’, ‘걸리버 여행기’, ‘동물농장’, ‘어린 왕자’, ‘이솝우화’ 등을 읽으며 자신을 섬기는 일, 자신을 향해 걷는 일이 가장 가치 있고 생산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섬기는 자는 질문을 할 수 있고, 자신을 섬기지 못하고 자신의 외부를 섬기는 자는 이미 있는 남들의 견해만 살피는 대답에 빠진다. 질문하는 자는 우선 자신을 궁금해하는 능력이 있다. 외부에 있는 것을 어루만지기보다는,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것을 살아보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머리에 이미 있거나 집단에서 공유하는 정해진 생각을 확대 재생산 하는 일에 빠지지 않고, 세계를 사실대로 관찰하고 독립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세계의 모든 생산은 질문의 결과다. 그래서 질문하는 자, 즉 자신을 향해서 걸을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서는 생산의 주도권을 잡는다. 자신을 향해서 걷지 못하는 자는 세계를 사실대로 관찰하기보다는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경향이 강해서 허망한 정신승리법에 빠져 산다.
바로 ‘아Q정전’에 나오는 아Q다. 아Q가 많이 사는 나라는 약해진다. 나라가 약해지면, 외국의 침략을 당하거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식민지가 되기도 한다. 나라가 약해져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는 이치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당신이 아Q이면 언제나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다.
자신을 궁금해할 줄 아는 자들은, 궁금증이 살아있기 때문에, 인식 능력이 굳지 않고, 그 이면까지에도 의식을 펼칠 줄 안다. 평화는 평화이고 위기는 위기인 줄만 아는 아Q들과는 달리 그들은 평화 속에서 위기를 보고, 위기 속에서 평화를 그린다. 보통 사람들이야 평화 속에서 평화를 즐길 뿐 위기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지도자라면 깨어 있어야 하는데,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지면,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형편없어져서 부패해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류성룡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자초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맹목적인 평화주의에 빠져 각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전란이 발발하기 몇 달 전, 임진년(1592) 봄에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 변방에 보내 대비상황을 살펴보게 하였으나, 활, 화살, 창, 칼 따위를 보아도 “대부분 문서상으로만 갖추고 법망을 피하고자 하였을 뿐”이었다. 별다른 대비책은 없었다. 류성룡이 신립을 만났을 때, 이미 전란이 날 것을 예상하고 적들의 형세를 묻자, 신립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아Q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 현실에 대해 무지하고 자만한다는 사실이다. 류성룡이 일본의 조총까지 언급해도, 신립은 여전히 “비록 조총이 있다 한들 어떻게 모두 적중시키겠습니까?”라고 정신승리법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이때 류성룡이 한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나라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어 군사들이 나약해져 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적에 대항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당시 신립같은 지도자들이 겨우 이런 정도의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589년 기축옥사를 계기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폭발하였고, 이것이 아마 선조 초기부터 만들어진 붕당정치를 더욱 심화시킨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붕당정치는 요즘 말로 하면, 진영의 정치이다.
지도자들이 진영에 갇혀 있으면, 우선 생각하는 능력이 거세된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진영에서 정한 이념을 확대 재생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결국 국가보다는 진영의 이익을 더 중시해버리는 데까지 빠질 수 있다. 진영에 갇히면 생각하는 능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에 현실을 진영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보여지는 대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정책이나 태도가 실재적이지 않고 이념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신묘년(1591년)봄에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의 정황을 살피고 돌아왔는데, “배가 부산에 정박하자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일본 정황을 급하게 보고하였다. 얼마 뒤 임금을 만난 자리에서” “김성일의 대답은 달랐다.” “신은 그러한 정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김성일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탠다.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시키니 옳은 일이 아닙니다.” 김성일은 진영에 갇혀 나라의 차원에서 사고할 수가 없었다. 국론이 통일되지 않고,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으면, 이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류성룡이 후세를 위해 ‘징비록’을 남긴 이유이다.
기업이 망하는 것도 먼저 스스로 망한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먼저 스스로 망한다. 외부의 경쟁자들은 망해가는 이 기류를 타고 들어올 뿐이다. 외부의 경쟁자들은 이런 기류를 먼저 읽고 말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6년에 일본의 국왕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을 가지고 온 “야스히로가 안동 구미를 지날 때 창을 들고 서 있는 사내들을 보더니” “너희들은 창 자루가 매우 짧구나.”라고 하면서 비웃었다. 조선의 예조판서가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야스히로가 후추를 부리니 기생과 악공들이 그것을 줍느라 서로 다투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야스히로가 말한다.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이미 기강이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이런 말들을 조짐으로 읽고 대비했어야 했지만, 진영에 갇혀 생각이 끊긴 우리는 어떤 예민함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속수무책이었을 뿐이다.
‘징비록’을 남긴 류성룡도 이렇게 살면서도 나라를 완전히 뺏기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던 결과를 우리 자신에게서는 찾지 못한다. “이러한 일을 겪고도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늘이 도와주신 것이다. 또한 선대 임금의 어질고 후덕한 은택이 백성의 마음에 굳게 맺혀있어 백성들이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고. 성상께서 명나라를 섬기는 정성이 황제를 감동시켜, 천자국이 제후국을 돕기 위해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일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진영의 좁은 시각에 갇혀 스스로 힘을 기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다가 외국의 힘을 빌려 나라를 살려놓으면, 분명히 그 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할 뿐이다. 조선이 긴 시간 명나라와 그런 관계였다. ‘징비록’을 읽으면,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당시의 민심은 침략하러 온 일본군이나 도와준다고 온 명군을 별 차이 없이 대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명나라의 원군은 철저히 자신의 이익대로 움직였다. 명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온 원군이라면 모두 다 그렇다. 선조는 “일본과 결전을 벌어야 한다”고 했지만 명나라 군대는 듣지 않았다. 그들은 “강화를 통한 전쟁의 종료만을 기대할 뿐”이었다.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려는 조선군을 적극 제지하며 일본군의 무사 퇴각을 책임질 정도였다.”
임진왜란 300년 후에, 청나라와 일본은 다시 한반도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끝내고,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맺는데, 조약의 제1조가 “조선이 완전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외국의 두 나라가 전쟁을 하고 맺은 강화조약 제1조가 뜬금없이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는 것이라니...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지고, 진영에 갇혀 좁게 사는 것이 일상이 되면 언제라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1592년에도 당할 수 있고, 1895년에도 당할 수 있다. 2000년대 언제라도 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평화가 오래 지속되어 맹목적 평화주의가 판을 치는 데다가 또 그 속에서 위기를 읽어낼 수 있는 지적 사고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언제라도 당할 수 있다.
전란 당시 우리에게는 그래도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은 정해진 생각에 갇히지 않고, 그 벽을 넘어서는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상 우수사 원균과 좌수사 박홍은 왜선의 규모만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우리 군의 화력과 우수한 선박 운용법은 활용해보지도 않는 채 배와 무기를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총의 사거리가 함포에 비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판옥선에는 함포를 탑재할 수 있다는 결정적인 장점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불패 신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는 비장한 명언은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의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함포와 판옥선이라는 산업적이고 기술적인 성취가 버티고 있었고, 그 성취를 관찰하는 사고력이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는 말을 토할 수 있는 내공은 갑자기 나오지 않는다. “평소에 그가 자신을 함양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모범이 되는 이런 문장은 자신을 함양하고, 자신을 궁금해하고, 자신을 향해서 걸을 수 있는 사람에게서만 나온다. 비록 슬프지만, 그런 사람이 걷는 비장한 길을 다시 음미해보는 것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모든 사람에게는 의무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한 차례 고문하여 사형을 감해주고, 관직을 삭탈하고 사졸로서 군을 따르게 하였다. 이순신의 노모는 아산에 살고 있었는데 이순신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고 근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순신이 옥에서 나와 아산을 지날 때 상복을 입은 채로 곧장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종군하니, 사람들이 이를 듣고 슬퍼하였다.” 상복을 입은 채로 아산을 지나던 이순신, 그는 혹시 자신을 향해서 걸었던 것이 아닐까?
최진석, 『나를 향해 걷는 열걸음』, 열림원, 2022, 324~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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