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나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내 직업이 내게 끊임없이 들이밀던 송곳이다. 창의성에 대한 수없이 많은 주장들과 방법들을 물고 늘어져 탐색한 후에 ‘교육’으로 포장하여 전달하고자 한다. 제대로 되었다면,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매우 희박하다.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다양하게 교육을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긴 시간동안 창의성이 발휘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세계적으로 많이 팔린 책이 있다. 그것을 함께 읽고 토론하여 성공하게 된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그 책 안에는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는 제목이 첫 번째로 걸쳐 있다. 이 내용을 읽었다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또 그런 사람이 생겨날까? 공자는 인격을 완성하는 최고의 방법을 말해준다.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 문제는 이 말을 듣고 실생활에서 정말로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게 되는가의 여부인데, 대개는 시험지 답안에만 쓰고 끝난다. 그것을 구체적인 생활로까지 끌고 나가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포용을 이야기 하면서 포용의 혜택을 입으려고만 하지, 자신을 양보하여 포용의 주도자가 되려 하지는 못한다. 포용에 대해서 아무리 토론하고 가르쳐도 포용이라는 가치 있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포용 가르치기와 포용 하게하기가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교육이 가능하기나 한가라는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포용이나 창의성이나 하는 것에 관하여 수없이 많은 글들이 있다. 논문도 있고 에세이도 있고 철학책도 있고 자기 계발서도 있다. 문제는 이런 ‘글’들과 ‘말’로는 ‘창의성’ ‘바로 그것’이나 ‘포용’ ‘바로 그것’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은 인간으로서의 완성이나 승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래로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였나 보다. 2000년도 훨씬 더 되는 과거의 중국 어느 땅에 장자(莊子)도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책을 소중히 여긴다. 책은 말을 펼쳐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은 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말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의미다. 의미는 또 무언가를 가리키는데, 그 의미가 가리키는 것은 말로 전해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책에 담아 소중하게 전한다. 세상이 아무리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사실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못된다. 세상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진짜 소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으로 봐서 보이는 것은 형체와 색깔이고, 귀로 들어서 들리는 것은 이름과 음성이다. 슬프도다. 세상 사람들은 그 형체, 색깔, 이름, 음성으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형체, 색깔, 이름, 음성으로는 진실에 접근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로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누가 이 사실을 알기나 하겠는가?”
글이나 말로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창의성’의 진실은 ‘창의성’이라는 단어 너머에 있다. 속에 감춰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포용’의 진실은 ‘포용’이라는 단어나 말 너머에 감춰져 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그것들을 직접 행하게 해 줄 수 있는 동력으로서의 진실은 은폐되어 있다. 그래서 신비하고 비밀스럽다. 인간이 인간으로 완성되고 더 높이 승화되는 길은 바로 이 신비에 접촉하면서만 가능하다. 그 신비스런 비밀에 관하여 장자는 우화 한 토막으로 설명 한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사랑채 쯤 되는 곳의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이 그 아래 마당에서 수레바퀴를 만들다가 연장을 내려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묻겠습니다.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은 어떤 말들을 엮은 것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들이지.’ 윤편이 그 말을 받아 다시 물었다. ‘그 성인은 아직 살아 있습니까?’ 환공이 답했다. ‘이미 죽었지.’ 윤편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군요.’ 환공이 화가 나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나 깎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제대로 설명하면 괜찮지만, 설명을 못하면 죽을 줄 알아라.’
윤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 보건대, 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않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헐겁지도 않고, 빡빡하지도 않게 하는 것은 손에서 이루어지고, 거기에 마음이 응하는 것이지, 입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습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알려줄 수도 없고, 제 자식 역시도 저로부터 그 비결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이라는 이 나이 되서도 제가 수레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옛 사람도 전해줄 수 없는 바로 그것을 따라 죽어버렸습니다. 그런즉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이 옛 사람의 찌꺼기일 뿐인 것입니다.”
진실은 ‘전해줄 수 없는 것’ 바로 거기에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거기서 모든 색깔과 음성이 출현한다. 색깔과 음성 너머의 바로 그곳을 각자의 내면에 현현(顯現)되도록 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경우에라도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 현현되면 마치 비밀의 방 열쇠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강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전해줄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의 밑에서, 그 사람이 적절한 태도로 남긴 결과들을 받아먹고 그것들을 숙지하려 노력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바로 자유가 아니라 종속이다. 그 ‘전해줄 수 없는 것’을 나름대로 갖는 것이 독립이다. 독립이나 자유로 이끌 수 있는 비밀은 환공이 읽는 책 속에 읽거나, 그 책을 쓴 사람의 말 속에 있지 않고 윤편의 ‘손’에 있다.
지식에 있어서는 생산자가 되느냐 수입자가 되느냐가 가장 분명한 정치 구도다. 지식의 생산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주도적이며 효율적이지만, 지식의 수입자는 결국 종속적이다.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가장 고효율의 장치가 지식(이론)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주도권이 세계에 대한 주도권을 결정한다. 그래서 종속적인 국가의 국민들은 강대국으로 지식을 배우러 간다. 소위 유학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오랜 세월 수많은 학인들이 해외에 나가 배우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요직을 맡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는 유학한 사람들이 운영해 온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학하고 온 사람들로 인해서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곳에 도달했는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곳인 어디인가? 유학하고 온 사람들로 인해서 갈 수 있는 궁극적인 곳이란 바로 다름 아닌 지식 생산국이다. 지식을 생산하면 세계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게 되므로 결국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국가를 이룬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물론 기능적으로는 상당히 발전했지만, 여전히 지식 수입국이며 종속적이다.
왜 아직도 이러한가? 그것은 윤편의 ‘손’을 보지 않고, 환공의 책에 적힌 ‘글’만 보고 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만 들었지, 그들의 ‘말’이 나오는 ‘비밀스런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스런 그곳’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므로 ‘전해주기 어려운 곳’이다. 유학 가서 윤편의 ‘손’이 만들어낸 수레바퀴만 얻어오고 ‘전하기 어려운’ 윤편의 손놀림을 보지 않으면 지식의 생산에는 나서지 못한다. 그래서 지식 생산이라는 독립적인 도전 대신에 내내 습득해 온 콘텐츠를 전달하고 지키는 일 만 하다 간다. 이것은 ‘찌꺼기’에 빠져 있는 일과 같다.
지식은 모험과 도전의 결과다. 지식 생산에는 반드시 모험과 도전이라는 비밀스런 덕목이 작용한다. 지식 생산국에 가서는 생산된 결과를 습득하기 보다는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배울 일이다. ‘생산된 결과’는 보이고 들린다.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모험과 도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스런 활동이다. ‘생산된 결과’는 환공의 책이며, 생산 과정은 윤편의 손놀림이다. 종속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비밀을 접촉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지, 그 사람들이 비밀스런 활동을 해서 낳은 결과를 배우는 것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윤편의 ‘손’은 ‘글’이나 ‘말’에 가깝지 않고, 오히려 ‘모험’이나 ‘도전’에 가깝다. 말이나 글을 배운 것으로는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다. ‘모험’이나 ‘도전’으로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글’이나 ‘말’은 전수할 수 있어도, ‘모험’이나 ‘도전’은 전수할 수 없다. ‘모험’과 ‘도전’은 오직 한 사람의 고유한 욕망으로만 세상에 드러나지, 전수하고 못하고의 차원에 있지 않다. 글이나 책 너머의 비밀스런 곳에 있다.
윤편의 ‘손’은 전달되지 못한다. 아들도 그 ‘손’ 그대로 전수받지 못한다. 결국 신비스런 그곳,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은 그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얼마나 안타깝고 쓸쓸한 일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 쓸쓸함의 그늘 아래서만 자유와 독립이 고개를 든다. 그 쓸쓸함의 그늘 아래서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을 모험과 도전으로 실현해 내는 일이 사는 맛 아니겠는가. 내가 나로 사는 일 말이다. 그래서 내가 또 하나의 윤편이 되거나 윤편의 대행자가 되지 않고, 내 안에서 윤편을 실현해버린다. 윤편의 내가 아니라, 나의 윤편으로 재편하는 일, 이것이 바로 자유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자유의 결과를 주우러 다니는 일을 멈춰야 한다. 내가 자유여야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할 내 안의 신비처를 지키다 보면, 천천히 내 손이 윤편의 손을 넘어선다. 내 손, 내 손에 집중하라. 윤편도 찌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