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21일자 어느 신문 인터넷 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마크롱 대통령은 18일(현지시간) 파리 외곽 몽 발레리앙 추모공원에서 열린 샤를 드골의 대독 항전 연설 78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이날 마크롱 대통령은 행사장 앞에 모여 있던 청소년들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10대 남학생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잘 지내요? 마뉘?”라며 마크롱의 이름(에마뉘엘)을 제멋대로 줄여 불렀다. 이 남학생은 노동해방을 노래한 혁명가요 ‘랭테르나시오날’(C’est la lutte finale)의 후렴구도 흥얼거렸다. 별다른 악의는 없는 표정이었지만 약간은 빈정거리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이때 마크롱 대통령은 소년과 악수를 한 뒤 곧바로 “아니야 아니야”라고 고개를 저으며 “오늘 공식적인 행사에 왔으면 거기에 맞게 행동해야지”라며 훈계를 시작했다.
그는 “오늘은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 ‘샹 데 파르티잔’(레지스탕스의 투쟁가)를 부르는 날이야. 그러면 나를 ‘므슈’(성인남성에게 붙이는 경칭)나 ‘므슈 르 프레지당’(대통령님)으로 불러야 한다. 알겠니?”라고 설명했다. 이 남학생은 바로 주눅이 들어 “죄송합니다. 대통령님”이라고 말했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아주 좋아!”라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절도 있게 행동해야 해. 네가 만약 언젠가 혁명을 하고 싶다면 먼저 학교를 마치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줄도 알아야 해”라며 팔목을 툭툭 치면서 충고했다.
저항감 있는 젊은이에게 호응하며 공감해주는 대통령도 멋있지만, 이렇게 훈계하는 대통령도 멋있다. 마크롱은 젊은이의 ‘혁명’을 부정하지 않았다. ‘혁명’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말해주는 방식으로 훈계의 격을 지켰을 뿐이다. ‘절도 있는 행동’과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이 ‘혁명’의 성공을 결정한다고 말해주었다.
‘혁명’은 이름 붙은 세계의 경직성을 부수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세계를 펼치려는 도전이라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혁명은 ‘질서’를 일거에 ‘야만’으로 몰아넣으며, ‘환상’을 현실화 하려고 시도한다. 모든 종교도 다 근본정신은 혁명이다. 그래서 혁명과 종교의 염원은 모두 다음과 같다. “이 세계는 너무 낡았어요. 이제 낡은 이 세계를 버리고 저 세계로 넘어가야 해요. 그래야 사는 것처럼 살다갈 수 있어요.” ‘저 세계’는 주장하는 자 외에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저 세계를 설명하는 문법은 아직 없다. 공허하게 시작된 이 외침을 깃발로 흔들며 사람들을 설득해서 모은 것이 종교들이다.
종교의 근본정신은 ‘혁명’이다. 종교에서 혁명이라는 근본정신이 사라지고, 조직 관리에 더 많은 힘을 들이고 있다면 이미 많이 낡았다는 뜻이다. 혁명을 조금 낮추고 순화해서 흔히들 ‘혁신’이라고 한다.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혁신은 생명 혹은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생존하려면 혁신해야 한다. 혁신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면 창의다. 이렇게 보면, 창의도 생명의 존재 방식들 가운데 중심 자리를 차지한다. 창의니 혁신이니 하는 것들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참 생명이나 참 존재로 살고 싶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 사항이다.
혁명은 아무리 환상이고 야만이어도 ‘절도 있는 행동’, ‘학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할 때라야 효율적으로 완수될 수 있다. 혁명의 주체들은 왕왕 혁명적 환상과 야만에 빠져, 혁명의 길과 관계없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착실한 보폭’을 중시하지 않는다. ‘착실한 보폭’이 나라에서는 ‘정책’으로 현실화된다. 혁명이 정치로만 남고 정책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들은 ‘착실한 보폭’을 소홀히 한 결과다. 그럼 왜 ‘착실한 보폭’은 소홀히 다뤄질까? 지적으로 게을러서 걸어야 할 길이 지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건너 뛰어 바로 혁명의 경지로 올라서려고만 한다.
성철 스님은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하지만 수자오계(修者五戒) 즉 ‘수행자를 위한 다섯 가지 가르침’에서는 ‘책보지 말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평소 수행하는 제자들에게도 ‘진리는 문장 아닌 마음에 있다’는 것을 자주 강조하였다. 높은 단계의 경지에 오르려는 포부는 가졌으되 근기가 그 포부의 무게를 감당할 정도로 갖춰지지 못한 사람이 성철 스님의 이 말을 듣는다면, 바로 책읽기를 끊을 수 있다. 그것이 훨씬 간편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책 읽지 말라’는 이 말이 독서광으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문장과 마음’의 관계를 깨달은 사람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 부단한 책읽기의 과정도 거치지 않았으면서 바로 책 끊기의 경지에 오르려 하다가는 인생에서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어떤 큰 스님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계율을 넘나들 수 있었다. 이것을 본 새끼 스님도 덩달아 계율을 넘나든다. 계율을 넘나든 것은 같으나 그 높이와 깊이는 다르다. 높이와 깊이가 다르면 감화력이 다르다. 새끼스님도 큰 스님이 아주 긴 시간동안 수계(受戒)의 고통과 지난함을 정성껏 거치고 나서 높은 위치에 오른 후에야 수계(受戒)의 한 형식으로서 계율을 넘나든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새끼 스님은 그 고통과 지난함을 피하고자 계율을 넘나드는 행위만 따라서 한다. 지적인 게으름이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깨달음은 늘 경박하게 쪼그라든다.
한 때 음식 한류를 일으키고자 노력들 했다. 그러나 녹록치 않다. 일본의 스시가 국제적으로 가지고 있는 위상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다. 스시와 비빔밥은 왜 이리 차이가 날까? 한국과 일본이 가지고 있는 국제적 위상이나 이미지의 차이가 이유일 수도 있다. 전략의 경험과 치밀함의 차이가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느닷없지만 이런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다. 바로 제품 자체의 문제다. 철저함이 부족하여 제품 자체에 매력이 더해지지 않은 것도 이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내 고향은 비빔밥으로 제법 유명한 동네다. 늦은 시간 고향에 도착하자 내가 다니는 단골 비빔밥 집이 벌써 문을 닫았다. 나는 새로 문을 연 것처럼 보이는 다른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도 비빔밥이 있었다. 주문한 비빔밥을 비비면서 나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밥이 너무 뭉쳐져 있어 잘 비벼지지가 않았다. 숟가락으로 잘게 부숴가며 비볐다. 비비기 어려운 비빔밥이라니… 그러고 보니 비빔밥을 먹다가 이런 일을 가끔 당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상황은 드믄 경우다. 내가 어쩌다 들른 어느 초라한 집에서 겪은 경험을 가지고 비빔밥을 다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난감한 상황을 겪으며 비빔밥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는 했다. 비빔밥에 가장 적합한 쌀 품종은 무엇일까? 비빔밥에 최적화된 밥의 점도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밥의 온도는? 나물의 온도는? 최적화된 나물의 삶기는? 밥과 나물의 비율은? 그릇의 온도는? 비빔밥에 잘 맞는 그릇의 재료는?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져 비빔밥에 관한 정보를 아무리 뒤져도 이런 의문은 해소될 길이 없었다. 내가 찾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표준화된 연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 약 한 달 뒤 어느 스시 집에 가는 일이 생겼다. 나는 일부러 요리사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잡았다. 식사하면서 몇 가지를 물었다. 비빔밥을 먹다가 생긴 의문들을 스시로 바꿔 죄다 물어봤다. 그 요리사는 모두 말해줬다. 스시에 적합한 쌀 품종들이나 밥의 온도나 밥의 점도 등을 막힘없이 대답했다. 구체적인 수치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개는 어느 것에나 표준화된 규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실 개성이나 경지도 다 이 표준화된 규격을 수행한 다음의 일이어야 제대로다.
세심하게 살피면 쩨쩨하게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쩨쩨하다고 힐난할 수 있다. 한국 음식은 손맛이 최고라거나 경험에서 우러난 자신만의 경지가 있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한국 문화의 특징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온도계를 갖다 대거나 자를 들이미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일들이고, 진짜 고수는 어림짐작으로 해도 다 최고의 경지를 산출할 수 있다고도 할 것이다. 손맛이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손맛의 비밀을 궁구하지 않고 그냥 말한다. 손맛을 말하려면 손맛이 연구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사실 대충한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착실한 보폭’이 결여된 경지란 항상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치 ‘절도 있는 행동’과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을 배우지 않고 ‘혁명’을 꿈꾸는 것과 같다. 지난한 수계의 고통을 겪지 않은 채, 계율을 넘나드려는 것과 같다. 착실한 보폭만이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장한다. 어떤 경지도 일관성과 지속성이 결여된 것은 운이 좋은 것에 불과하다. 품질이 들쭉날쭉 할 수밖에 없다. 어떤 개성도 ‘착실한 보폭’을 걸은 다음의 것이 아니면 허망하다. 허망하면 설득력이 없고 높은 차원에서 매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많은 일을 그냥 ‘감’에 맡겨 해버린다. 스시 정도의 위상을 갖고 싶으면서도 스시 정도의 연구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결과는 허망하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높은 경지란 없다.
도가 철학을 좀 아는 사람들은 ‘무위’를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착실한 보폭’을 하수의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지적인 게으름이다. 우선 ‘장자’ 첫 페이지를 보라. 곤(鯤)이라고 하는 조그만 물고기가 천지(天池)라고 하는 우주의 바다에서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크기로 자라나자 어느 날 바다가 흔들리는 기운을 타고 하늘로 튀어 올라 붕(鵬)이 되었다. ‘장자’에 나오는 대부분의 얘기는 다 이 대붕의 경지다. 그래서 도가 철학에 우호적인 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붕의 모습만 인정하고 따르려 한다.
그러나 반드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대붕은 조그맣던 곤이 엄청난 축적의 과정을 겪은 후, 몇 천리나 되는지도 모를 정도로 커지고 나서 된 영물(靈物)이라는 것이다. 매우 두터운 축적의 과정이 영물을 만들었다. 두터운 축적의 공, 즉 적후지공(積厚之功)을 의식하지 않은 채, 대붕의 ‘자유’나 ‘소요유’를 흉내 낸다면 다 방종에 가까울 뿐이다.
우리는 흔히 근대를 제대로 겪지 않았다고 한다. 식민지를 겪은 일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하지만 외세의 억압과 관계없이 우리 스스로 근대를 학습하여 해낼 수 있는 것들도 있다. 근대를 특징짓는 몇 가지 내용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표준화와 객관화다. 근대란 인류가 진화를 해나가면서 만든 매우 빛나는 한 고리다. 표준화를 해내지도 못했으면서 하는 표준화에 대한 현대적 비난은 다 경솔하다. 결과는 허망할 것이다. 객관화 과정을 바닥까지 겪지 않고 객관화를 비판하는 것도 경솔하다. 결과는 비참할 것이다. 손맛과 경험에만 기대서 만든 비빔밥은 매력을 갖기 어렵다. 더 철저해져야 한다. 두터운 축적이 없는 창의성도 있기 어렵다. 야성을 유지하면서 하는 축적! 철저함! 당신을 영물로 만들어주는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