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위대한 탐험가들을 소개한 책들이 있다. 40여 명을 소개한 책도 있고 70~80명을 소개한 책도 있는데, 그 안에는 대부분 서양인의 이름들만 나열되어 있다. 저자가 모두 서양인이라서 그네들에게 익숙한 사람들만 기록했을 것이라고 억지로 자위해 보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탐험’이라는 주제에 동양인의 자취는 흐릿하다.
1840년 아편전쟁을 서양에 의한 동양의 완전 패배나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완전 승리라고 의미 부여를 할 때, 혹시 이것은 ‘탐험’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빚은 역사적 귀결이 아닌가 하고 다소 과해 보일 수 있는 생각을 해본다. 서양에는 직업 탐험가가 존재한 역사가 있다. 동양의 전통에서 탐험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는 찾기가 어렵다. 탐험이 인간 활동의 뚜렷한 한 유형이 된 곳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던 것이다.
탐험에 제일 가깝게 모험이라는 말이 있다. 탐험은 위험한 곳을 찾아가는 매우 무모한 행동이고, 모험은 위험을 무릎쓰는 일이다. 탐험이든 모험이든 기본적으로는 위험에 접촉하는 거칠고 과감한 기질이 관련된다. 위험한 것들은 다 이상하고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익숙지 않고 아직은 이름 붙지 않은 모호한 것들은 다 불손하다. 반대로 익숙한 것들은 편안하고 안전하다. 그래서 안전과 익숙함은 서로 가깝다. 불안은 생경함이나 모호함과 가깝다.
어쩔 수 없이 탐험가들은 익숙함을 오히려 답답해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익숙함과 결별하는 용기가 없다면 모험은 불가능하다. 모험은 불안을 감당하는 용기를 발휘해서 생경한 세계에 도전하고, 그곳을 사람이 살 수 있는 터전으로 만든다. 영토를 확장해 준다. 이렇게 하여 모험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데 필수불가결한 행위가 된다.
탐험과 모험의 기질이 없으면 안전을 중시하며 익숙한 세계에 안주하려 애쓸 것이고, 그런 기질을 갖추고 있으면 새로운 세계를 열려는 시도에 재미를 더 붙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창의적 행위는 탐험과 모험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발명한 것 가운데 행위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가장 효율적인 기재가 바로 지식인데, 당연히 지식의 생산도 모험의 결과들이다.
지식 생산이 이뤄지는 곳에는 모험심이 넘치고, 지식을 수입해 쓰는 곳에서는 모험심이 잘 발휘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식 생산국이 아니라 지식 수입국이다. 새로운 장르를 만들기보다는 우리보다 앞선 나라들에서 만든 장르를 채우며 살았다. 따라 하고 습득하며 살았다. 물론 상대적이지만, 좀 비약해서 말한다면 모험심이 더 강하지는 않았다.
‘안다’고 하는 문제도 그렇다. 우리는 보통 어떤 것에 대하여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데, 지식의 확장과 생산이라는 점에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는 발버둥치는 그 행위’까지를 포함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다. 자기 운동력도 없이 확장의 동력을 잃은 지식이라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모르는 곳은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불안의 처소이자 위험한 곳이다. 그 불안과 위험을 감당한 채 ‘에라, 모르겠다!’고 하면서 한발을 덜컥 내딛는 무모함으로만 가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더 나은 곳이자 새로운 곳이다. 이곳에서 누군가는 지식을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된다. 지식이나 정치나 문화나 예술이나 생활이나 모두 진화하고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일이 벌어지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탐험가적 정신이나 모험심이 있어야 한다. 결국은 용기다.
용기가 없으면 더 나은 곳으로 건너가려는 모험심이 사라져 현상을 지키는 기능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방송은 시청률에 빠져 생기를 잃고, 대학은 취업률에 빠져 길을 잃는다. 고등학교는 진학률에 빠져 청춘들을 고사시킨다. 정치도 지지율만 쳐다보면서 정권획득이라는 기능에 빠져 새로운 세계를 열지 못한다. 결국 진정한 승리는 요원하다. 더 나은 곳에서 새롭게 살고 싶으면 더 모험적이고 무모하고 과감하고 거칠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