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는 나의 이야기에서 흘러나온다
살아있는 욕망과 질문하는 힘이 있어야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제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 보겠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지 못하면, 그건 모르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논증’이나 ‘웅변’이나 ‘주장’이 횡행하는 시대를 살아왔지, ‘이야기’의 시대를 살지 못했어요. 안타깝지만 사실이에요. 그럼, 우리는 이야기의 시대를 살지 못했을까요? ‘내’가 아닌 ‘우리’의 시대, 집단의 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이지요. 이야기는 어디에 있습니까? 할머니가 계시던 아랫목에 있고, 조그만 샛길에 있고, 저잣거리에 있고, 공원 벤치에 있지요. 학교와 광장과 조직 속에는 이야기 대신 논증과 주장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한편에는 지성과 이성, 또 한편에는 쾌락과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지성과 이성이 지배하는 곳은 집단이 지배하는 곳이지요. 즉 우리, 관념, 이념 따위가 지배하는 곳이었어요. 반면 쾌락과 즐거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집단 또는 우리가 아니라 나에게서 확인됩니다.
이제 미래는 집단 속에 용해된 내가 아니라 나의 주도적 활동성이 우리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에는 논증이나 설득 대신에 이야기가 개입되어야 해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이야기를 하는 곳, 바로 그때와 그곳에 자기가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거짓말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는 엄밀한 논문 한 편 읽게 한다고 거짓말쟁이를 고칠 수 있을까요? 그보다는 피노키오 이야기 한 편 들려주는 게 더 좋겠지요. 이야기로 들려주어야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논문에는 감동이 없지만, 이야기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왜냐? 이야기에는 ‘내’가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나’로 존재하면, 거기에는 여백이 존재하여 다른 ‘나’들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들과 공존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야기를 하는 활동 속에는 이야기 하는 사람이 ‘나’로 존재하여, 다른 ‘나’가 끼어들 수 있는 공간을 준비해 두기 때문이지요. 이야기하는 공간 속에서라야 ‘내’가 다른 ‘나’를 맞이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 감동의 힘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지요.
그런데 논문에는 혹은 주장에는 ‘내’가 있는 대신에 진리라는 얼굴을 한 보편적인 이념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십상이지요. 여기에는 주장하는 사람 외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거나 참여할 공간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백이 없는 것이지요. 논증이나 주장에는 ‘여백’이란 치명적인 결함으로 읽히거든요. 논증이나 주장은 ‘우리’것의 테두리 안에서 형성되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되풀이하건대, 우리는 나를 가두는 우리입니다. ‘나’는 ‘우리’를 이겨 내고 내가 되어서 자기만의 꿈, 자기만의 행복, 자기만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중략)
저는 여러분들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로부터 나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면 아름답지도 창의적이지도 않습니다.
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죠? 장르는 자기로부터 나온 이야기에서 흘러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