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철학(생각)을 수입하는 나라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생각이나 사유의 결과들을 수입해서 살았던 습관을 이겨내고, 스스로 사유의 생산자가 되는 길을 열어야 한다. 사유의 결과를 배우는 단계를 넘어서서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으로만 자기 삶을 채우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전파하고, 대신해주는 삶밖에 살 수 없다. 이는 종속적인 삶이다. 종속적인 삶을 살아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가 바로 중진국 정도다.
이미 중진국 수준에는 높은 단계로 도달했으니 이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문을 열어야 한다. 사유의 수용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시선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단계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진정한 이유다.
이 대목에서 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1925년 1월 《동아일보》에 발표한 “낭객의 신년만필”이라는 글을 본다.
이해 문제를 위하여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시대와 경우가 같지 않으므로 그들의 감정의 충동도 같지 않아 그 이해 표준의 대소 광협은 있을망정 이해는 이해이다. 그의 제자들도 본사(本師)의 정의(精義)를 잘 이해하여 자가의 리(利)를 구하므로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는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름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주의와 도덕은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신채호, 『단재신채호전집(상)』, 형설출판사, 1972, 25~26쪽)
신채호 선생은 식민성을 비주체성 혹은 비독립성과 직접 연관시켰다. 외부의 생각이 우리에게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면 우리는 이미 주인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에게서 생산될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주인이 된다. 스스로 사유하지 않은 채 사유의 결과들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그 사유의 전도사로 살면, 그것이 바로 노예의 삶이다. 철학적 단계로 사유를 상승시키면 노예적 삶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독립을 이룰 수 있다.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선진국, 후진국을 이야기하고 국가 발전과 연결시키니까 이게 정말 철학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특히 그렇다. 그런데 나는 지금 철학의 내용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철학적인 사유의 높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린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 세계의 어떤 것도 현실이 아닌 것은 없다’는 사실, 그것을 알리고 싶다. 우리가 철학이라는 관념으로 포착한 그 차원의 사유도 현실을 포착한 것이지 관념 자체의 구조가 아니란 뜻이다. 추상적인 이론만 붙들고 있는 것을 철학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이것 자체가 매우 비철학적이다. 철학을 하는 것은 높은 수준에서 생각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의 대상은 당장의 현실 세계다. 따라서 철학적인 태도를 가지면 당연히 당장의 현실 세계를 읽게 된다. 사유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철학하는 일이란 남이 이미 읽어낸 세계의 내용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읽을 줄 아는 힘을 갖는 일이다.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21세기북스, 2018[2017], 146~1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