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이솝우화』를 읽다 보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사람의 타고난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성품은 변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답변) 『이솝우화』에서 말하는 성품은 자기만의 고유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뱀보다 몸집이 작은 것은 여우의 고유성, 변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그런데 여우는 이것을 어그러뜨리려는 거예요. 이것과 딱 맞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이 에티오피아 출신 노예를 샀습니다. 그는 노예의 피부색이 그런 것은 이전 주인이 무관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노예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희게 만들려고 때를 벗기고 광내는 데 사용하는 온갖 것을 동원해서 빡빡 문지르고 닦아내고 씻겼습니다. 하지만 노예의 피부색은 바꿀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렇게 하다가 자기만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천성입니다. 우리는 종종 한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고 스스로 다른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요. 『장자』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요. 조나라 수릉이라는 동네에 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나라에서 제일 번화한 도시가 한단이라는 곳이었는데, 한단의 걸음걸이—제가 볼 때는 춤 스텝 같습니다—가 유명해서 그 젊은이는 한단으로 걸음걸이를 배우러 갑니다. 하지만 거기서 걸음걸이를 다 배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기 걸음걸이를 잊은 채 기어서 돌아왔다는 내용이에요.
이 수릉의 젊은이가 자유롭고 행복하고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방법은 자기 걸음걸이를 제대로 걷는 겁니다. 그러면 탁월해질 수 있어요. 오히려 다른 사람의 걸음걸이를 따라 하려고 하면 절대 잘할 수 없고 자기 걸음걸이마저 잊고 기어서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솝우화』나 『장자』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생긴대로 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함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질문) 저는 사람마다 그릇의 크기가 다양하고, 그 크기에 맞는 자리에 있으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답변) 사람은 자기 그릇을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우리는 자기가 가진 기질과 천성에 맞는 큰 그릇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자처럼 말이지요. 제삼자가 “이 사람은 종자야, 저 사람은 양재기야”라고 할 수는 있지만, 자기가 스스로를 종지라고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종지라고 하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양재기라고 생각해야 해요. 자기에게 자기 자신은 항상 커야 합니다.
제가 『이솝우화』에서 제일 중요하게 본 것이 우화라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탁월하게 만들어내는 길은 자기 삶을 신화로, 이야기로 구축하는 거예요. 저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제 신화를 쓰는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