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끊임없이 읽는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마주치는 모든 사건과 세계를 읽고 또 읽는다. 산다는 것은 그래서 ‘읽기’다. ‘읽기’의 원초적 동인은 무엇인가? 바로 지루함이다. 건조함이다. 쾌락과 즐거움을 원하기 때문이다. 건조한 대지 위에 비가 내리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읽기’는 일상의 여러 편린들 가운데 그저 그런 또 하나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존재론적 의미를 가져 버리는 것이다. 읽으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쾌락을 원하지도 않고 심심함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에게서 확인되지 않으니,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지루하거나 심심하다고 느끼는 마음의 그 자리가 바로 자기 존재의 터전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읽기를 원한다. 이는 다른 (사람의) 세계로 초대받는 일이다. 지루함을 시시각각 자각하는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의 생명력을 잘 지키고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뿌리가 튼튼하여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저것 자잘하게 따지지 않고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한다. 초대에 응하여 초대자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귀 기울이기가 무르익을 때쯤, 그래서 초대자가 닦아 놓은 길들이 편안해질 때쯤, 그 길 위에서 오히려 자신을 만나는 일을 경험한다. ‘읽기’는 결국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로 매우 성숙해진다. 읽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초대자와 대화를 하고,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초대자의 안내로 그가 준비해 놓은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길을 찾게 되는 극적인 소득, 이것이 ‘읽기’의 소명이다.
읽다가 자신을 대면하면 이제 자신의 길을 도모하게 되리라. 읽기로 찾아진 자기 자신의 생명력이 확장의 욕구를 표현하는 형국이다. 수용의 형식에서 발산의 형식으로 전환되는 이 과정은 읽기가 매우 성숙해질 때쯤 형성되는데, 그 발산의 형식을 우리는 초점을 좁혀 총체적으로 ‘쓰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읽기’는 수용이고, ‘쓰기’는 발전이자 표현이다. 이 극적인 일은 ‘자기 자신’에게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주의하자. 우리가 읽는 그 무엇은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것이다. 나의 ‘읽기’는 타인의 ‘쓰기’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에는 ‘쓰기’가 ‘흔적’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읽기’가 ‘읽기’만으로 있고, ‘쓰기’가 쓰기만으로 있지 않다. 어디 ‘읽기’와 ‘쓰기’만 그러하겠는가. 모든 일이 그러하다. ‘쓰기’와 ‘읽기’는 다른 두 사건이 아니라 기실은 하나의 사건이자 하나의 동작이다. 동시적 사건의 다른 두 얼굴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읽기’의 과정에는 반드시 ‘쓰기’의 활동이 예정되어 있어야 한다. 들어오는 일은 나가기 위해서고, 나가는 일은 들어오기 위해서다. 들어오기만 하고 나가지를 못하거나,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생명’으로 승화될 수 없다. ‘생명’력이 넘실대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한편에 말뚝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성장이나 변화는 바라지도 못한다. 생명력이 있는 살아 있는 주체는 들어오기만 하거나 나가기만 하지 않고 부단히 들락거릴 수 있다. 들락거리면서라야 주체는 무럭무럭 자란다.
‘읽기’와 ‘쓰기’는 하나의 활동이다. ‘쓰기’의 활동이 예정되어야 ‘읽기’는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된다. 옥수수의 생명이 되었던 물방울이 긴 여정 후에 승천하여 다시 지상에 강림하듯이 하강과 상승을 하나의 사건으로 품은 물방울만이 비로소 생명이 되는 것과 같다.
‘읽기’와 ‘쓰기’를 하나의 활동으로 내장할 수 있는 주체를 우리는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말한다. 독립적 주체는 ‘읽기’를 사명감으로 하거나 기억하기 위해서 하지 않고, 우선 재미로 혹은 심심풀이로 하기 시작할 것이다. 주장하기 위해서 읽지 않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