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직도 그러한가? 그것은 윤편의 ‘손’을 보지 않고, 환공의 책에 적힌 ‘글’만 보고 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만 들었지, 그들의 ‘말’이 나오는 ‘비밀스러운 그곳’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운 그곳’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므로 ‘전해주기 어려운 곳’이다. 유학 가서 윤편의 ‘손’이 만들어낸 수레바퀴만 얻어오고 ‘전하기 어려운’ 윤편의 손놀림을 보지 않으면 지식 생산에 나서지 못한다. 그래서 지식 생산이라는 독립적인 도전 대신에 내내 습득해온 콘텐츠를 전달하고 지키는 일만 하다 간다. 이것은 ‘찌꺼기’에 빠져 있는 것과 같다.
지식은 모험과 도전의 결과다. 지식 생산에는 반드시 모험과 도전이라는 비밀스러운 덕목이 작용한다. 지식 생산국에 가서는 생산된 결과를 습득하기보다는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배울 일이다. ‘생산된 결과’는 보이고 들린다.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모험과 도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활동이다. ‘생산된 결과’는 환공의 책이며, 생산 과정은 윤편의 손놀림이다. 종속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비밀을 접촉하는 일에서 시작되지, 그 사람들이 비밀스러운 활동을 해서 낳은 결과를 배우는 것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윤편의 ‘손’은 ‘글’이나 ‘말’에 가깝지 않고, 오히려 ‘모험’이나 ‘도전’에 가깝다. 말이나 글을 배우는 것으로는 자유를 획득하지 못한다. ‘모험’이나 ‘도전’으로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글’이나 ‘말’은 전수할 수 있어도, ‘모험’이나 ‘도전’은 전수할 수 없다. ‘모험’과 ‘도전’은 오직 한 사람의 고유한 욕망으로만 세상에 드러나지, 전수하고 못 하고의 차원에 있지 않다. 글이나 책 너머의 비밀스러운 곳에 있다.
윤편의 ‘손’은 전달되지 못한다. 아들도 그 ‘손’ 그대로 전수받지 못한다. 결국 신비스러운 그곳, 전해줄 수 없는 그것은 그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 안타까움의 그늘 아래서만 자유와 독립이 고개를 든다. 그 안타까움의 그늘 아래서 ‘전할 수 없는 그것’을 모험과 도전으로 실현해내는 일이 사는 맛 아니겠는가. 내가 나로 사는 일 말이다. 그래서 내가 또 하나의 윤편이 되거나 윤편의 대행자가 되지 않고, 내 안에서 ‘윤편’을 실현해버린다. 윤편의 내가 아니라, 나의 윤편으로 재편하는 일, 이것이 바로 자유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자유의 결과를 주우러 다니는 일을 멈춰야 한다. 내가 자유여야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할 내안의 신비처를 지키다 보면, 천천히 내 손이 윤편의 손을 넘어선다. 내 손, 내 손에 집중하라. 윤편도 찌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