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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53] 노자도 공자도 선진국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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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104회   작성일Date 24-06-04 14:12

    본문

    두 사상가들은 사상 내용이야 다르지만, 목적은 같았다. 바로 지배력을 가진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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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53
    2024. 5. 6.

    안녕하세요? 새말새몸짓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노자도 공자도 선진국을 꿈꿨다>입니다. 2018년에 발표된 글이지만, 여전히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새 말 새 몸짓으로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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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노자도 공자도 선진국을 꿈꿨다  

     

     안빈낙도(安貧樂道), 살면서 모질고 거친 파고를 이겨내려 몸부림치는 사람들은 다 한 번은 입안에서 웅얼거려 보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비록 가난하더라도 걱정 하나 없이 맘 편히 지내는 일상 말이다. 이 말은 공자(孔子)가 ‘논어’의 ‘옹야’편에서 제자 안회를 평하는 문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안회야, 너 참 대단하구나! 한 바구니의 밥과 한 바가지의 국물로 끼니를 때우고, 누추한 거리에서 구차하게 지내는 것을 딴 사람 같으면 우울해하고 아주 힘들어 할 터인데, 너는 그렇게 살면서도 자신의 즐거워하는 바를 달리하지 않으니 정말 대단하구나!” 여기서 ‘즐거워하다’는 ‘악’(樂)을 번역한 말이다.


     공자가 살던 당시의 용법으로 볼 때, 이 ‘악’은 그냥 감각적인 쾌락으로 마음이 들뜬 상태를 말하는 것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은 절제 없이 탐닉(淫)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탐닉으로 빠지지 않을 정도의 고양되고 절제된 즐거움인 ‘악’(樂)은 ‘음’(淫)을 거부한다. “악이불음”(樂而不淫)인 것이다. 당시에는 사회를 유지하고, 교화를 완성하도록 만들어진 체계를 ‘예악’(禮樂) 체계라고 했다. 사회에 ‘도’를 실현하는 장치다. 그래서 안회가 즐거워하던 바를 달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도’의 높이에서 실현되는 삶을 추구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런 연유로‘옹야’편의 이 문장을 ‘안빈낙도’(安貧樂道)로 개괄한 것은 아주 옳다.

     그런데 이 표현을 자신의 직접적인 삶속에서 생산하지 못하고, 그냥 말로만 들여와서 쓰는 사람들은 생산될 때의 두터운 의미를 놓친 채 왕왕 얇고 가볍게 사용한다. ‘안빈낙도’가 원래 가진 두터움을 ‘안빈’과 ‘낙도’로 쪼개 얇게 쓰면서, ‘안빈’에만 무게를 두고 ‘낙도’는 가볍게 여긴다. 그냥 세상사의 무게를 내 던져버리고, 가난하더라도 아무 걱정 없이 맘만 편하면 ‘안빈낙도’로 여기는데, 그렇지 않다. 가난을 맘 편하게 대하는 것 정도에서 그칠 말이 아니다. 가난하더라도 그 가난 때문에 자신의 수준을 낮추지 않고,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 ‘안빈’이다. 이 가난은 자신의 무능이나 게으름 때문에 야기된 것이 아니라, 부를 일구는 일보다는 원래 가졌던 더 높은 지향을 지키고 실현하느라 부를 일굴 겨를이 없어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적극적으로 자초한 가난이다. 그 높은 지향은 바로 ‘도’(道)를 향한다. 당연히 ‘안빈낙도’에서 방점은 ‘안빈’보다는 ‘낙도’에 있다. 삶 속에서 ‘도’(道)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 비로소 ‘안빈낙도’ 할 수 있다. 가난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도’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안빈낙도’다.

     세계와 관계하는 인격이 얇고 가벼우면 무게감 있는 것들을 쉽게 잘라버리고, 감성과 도덕으로 삶을 분칠해버린다.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문법을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생산된 문법을 들여와 쓸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우에는 대개 감성적이고 도덕적이거나 이념적 태도를 갖기 쉽다. 이론으로만 들어오면서 그 이론이 생산될 때의 배경이 된 삶의 구체적 현장성이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체적 현장성까지 붙어있는 두께는 구현하지 못하고, 감각적이며 얇고 가벼워진다. 혁명에도 독립적 혁명이 있고, 종속적 혁명이 있다. 혁명을 스스로 생산한 이념으로 하면 독립적이고,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혁명이면서도 이미 생산되어 있는 이념을 구현하는 형태로 하면 종속적이다. 독립적이면 두텁지만, 종속적이면 가볍고 얇다. 가볍고 얇아지면 이념과 도덕을 지향하는 조급함을 넘어설 수 없다.

     우리는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다. 단순히 경제적이거나 군사적인 문제만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문법 등에서 아직 독립적인 생산 단계에 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나만 따로 놓고 말해본다면, 지식의 생산국에 진입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총체적인 지식 수입국이라는 뜻이다. 이런 비독립적 한계가 경제와 군사적인 문제의 높이까지 결정한다. ‘독립적인 생산 단계’에 든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모든 문제를 개괄하여 나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도전에 나서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선진국’이라는 단어 자체가 식상하기도 하고, 너무 비문화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들리는 지경이라는 것도 잘 안다. 이런 지경에 있는 분위기 속에서 몇몇은 이렇게 말한다. “선진국은 전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포악한 전쟁을 쉽게 하는 그런 단계는 올라갈 필요도 없다.”, “왜 꼭 선진국이 되어야 하는가. 그냥 이 단계에서 평화롭게 살면 되지.”, “공자도 도덕적으로 사는 삶을 말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도가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 왜 노자와 전혀 다른 말을 하는가. 노자는 나라의 통치 자체를 부정한 사람이다.” 공자와 노자가 선진국을 지향했다는 것만 말해도 많은 말다툼은 줄 것 같다. 이제 그것을 말해본다.

     감성적이고 도덕적인 편협함에 빠진 사람들은 공자를 정의와 개인적인 덕성의 함양만을 논하지 국가를 흥성시키고 부강하게 하려는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으로 얇게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공자는 ‘논어’에서 ‘나라를 흥성하게’(興邦)하는 일을 매우 중요한 목표로 제시하기도 하고, 덕성의 함양 자체를 국가의 부강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 ‘자로’편에 나오는 한 대목. “번지가 농사짓는 법과 원예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니, 공자가 말한다. ‘나는 경험 많은 농부나 원예사만 못하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가 다시 말한다. ‘번수가 소인이구나. 위에서 정의로우면 아래서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믿어주면 아래서 진정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하다면, 사방에서 자식들까지 업고 몰려올 텐데 꼭 농사로만 하려고 해야겠느냐.’” 공자가 강조하는 정의와 신뢰도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의미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자식들까지 몰려오는’ 현실적이고 국가적인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인구는 노동력과 군사력의 원천이었다. 산업을 발전시키고 국방을 강화시키려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자원이다. 다른 한 구절. “섭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답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설득하거나 기쁘게 해주고, 멀리 있는 사람들은 오게 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것을 정치의 실력으로 보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매력을 느껴 찾아오게 하여 산업과 국방을 더 강화하는 것이다. 공자는 ‘도덕적 자각 능력’을 성숙시켜서 윤리적 개인과 윤리적 국가를 이루면 그 매력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위정’편에 나오는 대목은 이렇다. “공자가 말한다. ‘덕을 기본으로 하는 정치, 즉 덕치를 하는 것은 북두성이 제 자리를 잡으면 모든 별이 우러르며 따르는 것과 같다.’” 덕치(德治)는 모든 별이 우러르며 따르는 효과를 갖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덕치 자체의 윤리적 정당성으로만 가질 수 있는 의미가 아니다. 공자에게서 ‘덕’은 국가 발전 강령의 핵심이다.

     세상에서 국가의 이익이나 발전과 더 관련 없는 사상가로 치부되기는 공자보다도 노자(老子)가 더 심하면 심했지 조금이라도 덜하지 않을 것이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도덕경’제48장만 봐도 된다. “무위하면 되지 않은 일이 없다.”(無爲而無不爲) 보통은 세상사에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無爲)로 보면서 개인의 안빈낙도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은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내가 해석하여 억지로 하는 말이 아니라 노자가 그의 책에서 그렇게 써 놨지 않은가. 노자의 시선은 오히려 ‘무불위’에 가 있다. 그렇다면, ‘무불위’라는 효과에서 가장 큰 것은 무엇인가. 노자에게서 이 점은 매우 분명하다. 바로 이어서 말한다. 바로 ‘취천하’(取天下), 즉 천하를 갖는 일이다. 나라를 키워서 여러 나라들 가운데 가장 큰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22장에서도 말한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덜면 꽉 찬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것만 주장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노자가 ‘온전해지고 꽉 채우는’ 것도 말했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7장에서도 말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자신이 앞서게 된다. 자신을 소홀히 하지만, 오히려 보존된다.” 노자는 앞서고 보존되기 위해서, 내세우지 않고 소홀히 할 뿐이다. 노자의 시선은 앞서고 보존되는 결과에 가 있지, 내세우지 않고 소홀히 하는 소극적인 과정에만 멈춰있지는 않다. 얇은 지성은 ‘무불위’로 대표되는 결과를 읽는 대신, ‘무위’만 읽는다. ‘안빈’만 보고, ‘낙도’는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공자에게서 ‘덕’(德)이 국가 발전에 봉사하듯이, 노자에게서는 ‘무위’가 국가의 선도적 역량을 갖게 한다.

     공자와 노자가 살던 시기는 중국의 기존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면서 새 세상이 열리는 과정에서 여러 나라들이 서로 지배적 우위를 점하려고 각축하던 때다. 이 두 사상가들은 사상 내용이야 다르지만, 목적은 같았다. 바로 지배력을 가진 나라를 만드는 일이다. 선도력과 지배력으로 우위를 점하는 나라를 꿈꿨는데, 요즘 말로는 바로 선진국이다. 그 목적을 공자는 ‘덕성’을 기반으로 해서 완성하려 했고, 노자는 자연 질서를 인간 질서로 응용하는 방식으로 완성하려 했을 뿐이다. 영혼의 완성을 이루려는 사람이 잡다한 현실을 따돌리기만 하면 될 것으로 믿다가는 얇고 창백하며 정체 모를 환각에 싸일 뿐이다. 공동체의 평화를 말하면서 정작 나라의 힘을 키우는 데 소홀하다가는 그 평화 한 조각도 자신의 땅 위에 세우지 못할 것이다. 나라를 걱정하면서 부국강병을 말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은 다 가짜다. 얇고 가벼운 것은 감각적이어서 빨리 오고, 두텁고 무거운 것은 느리게 온다. 느리게 오는 것이 진짜다.



    최진석, 《광주일보》, 2018년 10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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