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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43] 황홀한 삶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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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088회   작성일Date 24-04-30 10:37

    본문

    행복한 나, 욕망에 기댄 황홀한 나로 살기 위해서는 개념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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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143
    2024. 2. 26.

    안녕하세요? 새말새몸짓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장자의 오상아(吾喪我)'에 관한 것입니다. 철학자는 이 오상아를 '자기살해'라는 말로 풀고 있는데요, 진정한 자신으로 거듭나, 황홀한 삶으로 가는 첫 걸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확인해 보세요.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나를 장례 지내기, 황홀한 삶의 시작



     (중략) 소요유는 장차 철학의 주제입니다. 놀이, 즉 유(遊)라는 범주로 객관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 인간의 총체적 삶을 드러내려 시도한 철학자로는 아마 장자가 세계 최초가 아닐까 싶군요.


     그럼, 소요(逍遙)란 무엇이냐? 소요의 의미는, 기존의 가치관이 굳어져서 삶의 양식을 전체적으로 원활하지 못한 상태로 지배할 때, 그래서 생명력이 고갈될 때, 질적으로 전환하여 전혀 다른 각도에서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차원에서 누리게 되는 특별히 자유로운 경지를 말합니다. 이것을 도()와 일치된 경지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이런 과정을 장자는 장자』 「소요유첫머리에서 곤()과 붕()의 대비를 통해 묘사했어요. ()이라는 물고기는 북명(北溟)이라는 기존의 세계에서 얼마나 긴 세월을 보냈는지 그 크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성장했지만, 자신이 살던 바다라는 세계를 과감히 벗어나 전혀 새로운 하늘이라는 세계에서 붕()이라는 거대한 새로 전혀 새롭게 다시 태어나지요. 이 얼마나 천지개벽할 일입니까?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가 하늘을 나는 새로 다시 새로워지는 일, 장자가 보기에 이 정도는 되어야 개벽이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기존 패러다임 안에서 조그마한 변화를 도모하는 것은 새로움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소요라고 표현되는 장자의 이 새로움은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 근본적인 방법을 장자는 자기 자신을 장례 지낸다(吾喪我)”라고 말하며 자기 살해를 주장합니다. 자기 살해라니, 너무 섬뜩한가요? 이 표현은 제가 좀 과격하게 써 본 것인데요, 기존의 자기와 결별하지 않고는 절대 새로운 자기를 만날 수 없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상아(吾喪我)’라는 구절을 볼까요? ()는 새로워져서 우주의 질서에 동참하거나 자유의 경지에 들어 인격적으로 성숙해진 자아이고, ()는 가치와 이념에 의해 고착되고 굳어져 있으며 경색된 기존의 자아를 말합니다. 장자에게 소요는 먼저 기존의 경색된 질서에 의해 질식해 가는 자아를 해방시키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왜 기존의 자아를 살해해야만 하는 걸까요?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장자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가 신뢰하는 가치와 이념에 묶여 있고, 그 가치와 이념의 굴레는 점점 견고해지고 굳어 가서 결국 인간은 자신이 섬기는 가치와 이념에 의해 생명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고착되고 굳어 가며 경색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얘기지요. 그래서 자기 살해는 가치와 이념으로 결탁되어 폐쇄적인 형태로 굳어 가는 자기()로부터 벗어나 전체 세계의 원리, 즉 이 세계의 진실성과 함께 작동하는 개방적 자아()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치와 이념의 결탁으로부터 해방된 오상아의 상태를 장자는 어떻게 묘사했을까요? 다음은 장자』 「제물론(齊物論)의 첫대목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그 멍한 모습이 마치 짝을 잃은 사람 같았다. 안성자유(顔成子游)라는 제자가 옆에서 모시고 있다가 물었다.

     

    “어찌된 일입니까? 몸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되었고 마음은 불 꺼진 재와 같으십니다.

    지금 책상에 기대어 앉아 계시는 선생님은 전에 책상에 앉아 계시던 분이 아닙니다.”

     

    그러자 남곽자기가 말했다.

    “이런 질문을 하다니! 너 참 대단하구나!

    나는 지금 나를 장례 지냈다.

    네가 그것을 알아챘단 말이냐?”

     

     도대체 이게 뭔 소리인지 알쏭달쏭한가요? 여기서 오상아한 후의 모습이 나옵니다. ‘불 꺼진 재마른 나뭇가지의 형상으로 책상에 기대고 있는 남곽자기는 자신이라고 할 어떤 견고함도 없는 맥 빠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자기를 특정한 모습으로 견고하게 지켜 주던 가치와 이념을 모두 벗어던지고 난 후, 어떤 모습으로도 특정화되지 않으니 맥 빠진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오상아이전에 책상에 기대고 있을 때의 풍경에서는 남곽자기와 책상이 각기 다른 존재자로 분리되어 대립적으로 있었지만, ‘오상아이후에는 남곽자기 자신의 모습이 해체되어 책상의 모습에 일치함으로써 책상과 남곽자기 사이에는 절대적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절대적 화해의 상태에서 세상에 처하는 일,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소요입니다. 그것은 이전에 책상에 기대던 모습으로부터 오상아의 단계를 거쳐 지금 불 꺼진 재처럼 책상에 기대고 있는 모습으로 새로워진 경지입니다.

     

     자기 살해! 이처럼 장자는 극단적으로 자아를 부정했어요. 그러나 자기 살해의 대상은 가치와 이념으로 결탁된 자아()입니다. 가치와 이념으로 결탁된 자아를 부정하고 남는 것은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고 그냥 자기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참 자아인 것이지요. ‘일반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아니라 개별로 존재하는 자아라는 얘깁니다.

     

     행복한 나, 욕망에 기댄 황홀한 나로 살기 위해서는 개념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개념은 동사적 세계를 명사화한 작업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딱딱한 명사의 세계에서 말캉한 동사의 세계로 옮겨 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장례 지내는 자기 살해는 황홀한 삶으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최진석, 『인간이 그리는 무늬』, 소나무, 2013, 222~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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