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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뉴스레터 #041] 내용이 아닌 활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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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064회   작성일Date 22-05-30 00:14

    본문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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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뉴스레터 #041
    2022.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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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인문학에 관한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글은 <경계에 흐르다>에서 '무거운 주제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편에 수록된 것입니다. 2017년에 출간된 책이지만 여전히 지금에도 진한 여운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 이번 한 주도 늘 한 걸음 더 나은 삶으로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학술적으로 공인된 합의는 없지만 내가 이해하기로는 교양인이 되기 위해서다. 교양인이 되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교양인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서 자신의 삶 자체를 예술적 단계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다. 삶을 완성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양인은 어떤 사람인가? 바로 교양을 갖춘 사람이고, 자신이 갖춘 교양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또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은 보통 ‘Liberal Arts’라고 부르기도 하고, ‘Humanities’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Humanities’는 아마 15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이 썼던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 studia humanitatis’에서 왔을 것이다. 무엇이라고 부르던 간에 인문학의 기본 개념은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파이데이아paideia’에서 왔다.

     

     ‘파이데이아’는 기원전 5세기 중엽에 나타난 소피스트들이 젊은이들을 폴리스(도시국가)의 리더로 키우기 위해서 행하던 교육과정이다. 여기서 리더란 자유민으로 불리는 ‘능동적 시민’을 말한다. 피지배 계급으로서 자유가 없던 수동적인 노예들을 선도하고 끌고 나아가던 지배계급이다. 자유민들이 지시하고 노예들은 수행한다. 자유민들이 방향을 정해서 보여주면, 노예들은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자유민들은 이끌고, 노예들은 따라간다. 교양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잉태되어 자유민으로서 능동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고안된 교육 장치였던 것이다.

     

    (중략) 이처럼 교양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자유민이 자유민으로서 활동하는 데에 필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세계를 지배하고 이끄는 일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직업을 찾는 일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과 관련되지만, 이런 내용들로 이루어진 공부를 하는 목적은 바로 그런 지식들을 기반으로 하여 삶과 세계의 방향을 결정하고 이끌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려는 것이다. 지배적인 시선과 활동력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말로 바꿔도 된다.

     

     노예와 같은 수동적인 차원의 지식으로 채워서 살 것인가, 아니면 한 단계 상승하여 오히려 지식을 지배하고 관리하며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삶을 살 것인가가 여기서 갈린다. 교양인은 바로 여기서 처한다. 인문학의 처소다.

     

     그 나라의 수준이 다른 나라들을 선도하는 입장에 서면 선도하는 역량을 발휘하는 데에 필요한 교양적인 과목이나 내용이 중시되고, 그 나라의 수준이 다른 나라를 따라가는 입장에 있으면 따라가는 일을 잘할 수 있게 해주는 전공(전문) 과목이 중시된다. 따라가는 수준에 있는 사회에서 교양은 실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대접 받지 못할뿐더러, 감각적인 차원 정도에서 위로와 쾌락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되거나 개인적인 삶의 향유를 제공해 주는 것 정도로 취급되기 쉽다. 우리의 현실에서 교양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나 인문학이 이런 정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이다.

     

     인문학은 다른 분과 학문과는 매우 다르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은 그 학문을 채우고 있는 내용으로 규정되거나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높이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낸다. 즉 인문학의 목적은 인문적인 높이에서 사유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완성된다. 다른 분과 학문들도 이해가 심화되면 심화될수록 그 학문이 제공하는 내용을 넘어서서 인문적인 빛을 보여주는 단계로 상승한다. 즉, 역사적인 맥락과 의미를 생사하거나 문학적인 감동으로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학문 자체의 의미를 보여주는 철학적인 질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한다.

     

     이처럼 분과 학문들의 최고 정화 지점은 항상 인문적인 높이를 보여주는 바로 그곳에 자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학적 내용에 제한되지 않고, 바로 인문적인 활동성이나 인간 사유의 높은 지점을 제시하는 시선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본다면, 아무리 인문적인 지식을 넓고 깊게 가졌다고 하더라도 인문적인 높이의 시선을 갖기 못하거나 인문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인문학은 내용이 아니라 활동으로 완성된다.


    이제 내용을 답습하는 일을 넘어 스스로의 활동성을 발휘해야 한다.

    자신만의 활동으로 세계와 접촉하려는 용기가

    바로 창의성이다.

    내용에 대한 집착을 끊고 아무 내용도 없는 활동으로 덤비자.



    최진석, 「타이어가 아니라 바람일 뿐」,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279-285쪽에서  

     
    ** 새말새몸짓 활동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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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토요일 함평 호접몽가에서는 기본학교 2기의 강의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온라인과 병행하여 진행되었습니다. 

    • <추상과 모험>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강의는 오랜만에 뵙는 최진석 교장선생님의 수업이라 반가웠던 시간이었습니다. 

    •  교수님의 수업중 인상깊었던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안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발버둥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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