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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065] '가상'이라는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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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007회   작성일Date 23-04-30 22:59

    본문

    인간은 진화한다. 진화는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믿던 곳에서 점점 더 ‘안 만져지고 안 보이는 것’을 믿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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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065
    2022. 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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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입니다. 매주 월요일 철학자 최진석의 글과 (사)새말새몸짓의 소식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헌 말 헌 몸짓에서 새 말 새 몸짓으로 나아가자는 저희들의 외침이 한 단계 더 성숙한 '나', 더 상승하는 '우리'가 되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이번 주 소개해 드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은 <'가상'이라는 진실>입니다. 이 글은 가상의 세계라고 일컫는 '메타버스'가 가상이 아닌  또 다른 진실의 세계라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한번 확인해 보세요. 

    • 이번 한 주도 늘 한 걸음 더 나은 삶으로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가상'이라는 진실


       

     새로운 것은 익숙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으면 불편하고 불안하다. 인간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 바에야,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쉽게 불안을 느끼며, 거기에다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로 딱지를 붙인다. 음악에서도 르네상스의 풍을 따르려던 고전주의자들이 자신들과 다른 격조를 지닌 직전의 풍에 ‘찌그러진 진주’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바로크’의 명패를 단 것이 좋은 예이다.


     인간의 진화는 메타버스(Metaverse)까지 왔다. 이것을 우리는 그냥 가볍게 ‘가상세계’(假像世界)라고 번역하는데, 여기에는 문명의 진화에 정성을 들여 참여하려는 신중함이 부족하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이 진짜이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진짜가 아니거나 가짜라고 보는 배타적 폭력성도 보인다.


     ‘가상’이라는 단어에는 ‘가짜’라는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에 익숙한 사람은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진짜’(real)라 하고, 보이지 않거나 안 만져지는 것에는 쉽게 ‘가짜’(unreal)라는 낙인을 찍는다. ‘진짜’라고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빠지기도 하지만, ‘가짜’에는 그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치가 이러하니, 메타버스를 가짜로 취급하기 쉬운 ‘가상’으로 대하는 한, 메타버스에서 삶의 생산과 소비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기 어려워하고, 메타버스를 자신의 문명 영토로 만드는 데에 앞장서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진화한다. 진화는 ‘보이고 만져지는 것’을 믿던 곳에서 점점 더 ‘안 만져지고 안 보이는 것’을 믿는 곳으로 나아간다. 점점 더 안 보이고, 점점 더 안 만져지는 곳을 향해 인간은 달리고 또 달리는 것이다. 도구(기능)의 시대에서 기술의 시대로, 기술의 시대에서 과학의 시대로 진입한 후, 이제는 과학도 넘어서려고 하지 않은가. 도구(기능)는 기술보다 더 구체적이어서, 더 잘 보이고 만져진다.


     과학은 기술보다 더 추상적이어서 더 안 보이고, 안 만져진다. 활은 총보다 눈에 더 잘 보이고 잘 만져지며, 총은 활보다 잘 안 만져지고 안 보인다. 일상적인 언어활동 습관으로는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쉽게 풀어쓰면, 활은 기능의 산물이고, 총은 기술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이는 총을 만들 때 적용되는 지식이 활을 만들 때 적용되는 지식보다 더 높고 추상적이라는 것도 의미한다. 현대를 지식정보화 사회라고 하는 말은 지식과 정보가 생산에 직접 관여한다는 의미이고, 그런 의미에서 지식과 정보는 현대 기술 문명의 ‘망치’이다. 돌망치나 쇠망치만 망치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안 보이고 안 만져지는 곳을 향하여 쉼 없이 나아가면서 삶의 영토를 확장한다. 인간의 진화 역사는 삶의 영토를 확장하는 인간적인 사명감과 관련이 깊다. 삶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말은 진실의 영역을 넓힌다는 말이다. 예술가, 철학자, 시인 등이 저밖에 모르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어 보이지만, 아직 버림받지 않은 이유다. 데카르트는 수학이라는 진실의 영역으로 우리 삶을 확장해줬고, 프로이트는 사람이 살지 않던 무의식이라는 황무지를 사람 사는 곳으로 개간했다. 공자는 ‘도덕’의 세계를 사람이 사는 영토로 만들었으며, 노자는 세상에 없었던 ‘무’(無)의 세계에 진실의 깃발을 꽂았다. 함민복의 시 ‘섬’을 보라.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함민복 이전에 이런 섬과 이런 울타리는 있어 본 적이 없다. 시인 함민복은 우리에게 있어 본 적이 없는 섬을 가져다주었다. 섬의 진실이 확장되었다. 사람이 살아갈 영토를 확장해 준 것이다. 이렇게 확장된 영토도 거기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가짜’(unreal)로 취급하겠지만, 사실은 확장된 진실로서 ‘진짜’(real)이다. 주소를 가진 섬만 진실(real)한 섬이 아니라, 주소를 받지 못한 함민복의 섬도 진실(real)이다. 또 하나의 진실(another real)이지, 가짜가 아니다.


     ‘메타버스’는 가짜 머리띠를 두른 가상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계다. 실용적이고 진실한 인간의 영토 확장 여정은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메타버스는 확장된 영토로 진화한 또 다른 진실(another real)의 세계이지 진짜(real)를 흉내 낸 가짜(unreal)가 아니다.


     ‘가상’(Cyber)은 원래부터 진실의 한 형태였다. 아내나 남편을 진실로 사랑하는가? 당신은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이 해석한 남편, 당신이 해석한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에게 아내나 남편의 진실성은 ‘해석된 남편’, ‘해석된 아내’로서만 존재한다. 당신에게 진실은 내내 ‘가상’(Cyber)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원래 ‘사이버’(가상)를 산다. ‘가상’(Cyber)이라는 진실을 기술적으로 구현할 수 없었던 시대에서 구현하는 시대로 진화한 것이다.


    진화의 질주에서 겁먹고 내리지 마라. 진실을 찾는다고 멈추거나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는 여유를 부리기보다는, 한 번이라도 더 앞을 보고자 하라. 더 힘 있고 더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앞에 있다.



    최진석, <'가상'이라는 진실>,《중앙일보》, 2022년 0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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