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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056] 경계에 서서 흐름을 마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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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973회   작성일Date 23-04-30 22:47

    본문

    생물은 변화 자체다. 생명은 경계의 중첩이 흐르고 또 흐르는 과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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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레터 #056
    2022. 06. 27.
    • 안녕하세요?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입니다. 매주 월요일 철학자 최진석의 글과 (사)새말새몸짓의 소식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헌 말 헌 몸짓에서 새 말 새 몸짓으로 나아가자는 저희들의 외침이 한 단계 더 성숙한 '나', 더 상승하는 '우리'가 되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이번 주 소개해 드릴 글은 『경계에 흐르다』(소나무, 2017)에서 가져왔습니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인간은 늘 경계에 서야 한다고 철학자 최진석은 말합니다. 그래야만 그곳에서 생존할 수 있고, 나아가 강해질 수 있다고 하는데요, 아래에서 확인해보세요. 

    • 이번 한 주도 늘 한 걸음 더 나은 삶으로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경계에 서서 흐름을 마주하자.


     

     스틱스(Styx)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마 고등학교 시절 어느 날, ‘Boat on the River’라는 미국 노래를 듣고서인 것으로 기억된다. 스틱스는 그 노래를 부른 그룹의 이름이었다.

    “강 위의 나룻배를 스쳐가는 물결이 가만히 어루만지며 편안하게 해주니, 난 더 이상 울지 않으리… 내 근심 어린 얼굴도 사라지네…”라는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왜 그리 감당하지도 못 할 큰 근심으로 밤을 설치는 일이 많았던지… 방황 속에 힘들어하던 10대 소년은 이 노래를 들으며 적잖은 위로를 받았다.


     스틱스는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강 이름이다. 죽으면 이 강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면 뱃사공이 나와 배를 태워 사자를 지하의 세계로 인도해준다. 그 뱃사공의 이름은 카론(Charon)이다. 명왕성(冥王星)의 이름이기도 하다. 스틱스 강의 이쪽은 삶의 세계이고, 저쪽은 죽음의 세계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다. 여기엔 더 극적인 얘기가 함께 흐른다. 신과 인간의 결혼 이야기이다.


     신은 죽지 않고, 인간은 죽는다. 테티스(Thetis)라는 여신이 있었다. 여신은 아버지를 능가하는 아들을 낳으라는 신탁 때문에 인간인 펠레우스(Peleus)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는다. 아들은 인간과의 사이에서 낳았기 때문에 불사(不死)의 능력을 갖지 못했다. 자기 아들이 불사의 능력을 갖지 못해 고통 속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테티스는 제우스를 찾아간다. 제우스는 아들을 스틱스 강물에 담그라고 했다. 테티스는 아들의 발목을 잡고 강물에 담갔다. 그가 바로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아킬레스(Achilles)다. 스틱스 강물에 들어갔다 나온 아킬레스는 불사의 능력을 갖게 됐다. 단 테티스가 잡았던 발목만은 강물이 닿지 않아 불사의 능력에서 제외되었다. 바로 아킬레스건이다.


     생사의 경계 흐르는 ‘스틱스’ 강

     스틱스 강물에 무생물이 닿으면 녹아 없어지지만, 생물은 강물에 닿은 부분이 불사의 능력을 갖게 된다. 스틱스 강은 어떻게 생명체에게 불사의 능력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그리스 신화 전문가도 아닌 사람의 ‘멋대로 해석’이 시작된다. 스틱스 강이 불사의 능력을 갖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 강물이 생과 사의 경계에서 흐르기 때문이다.


     경계에 서 있는 자는 강하다는 것을 신화는 우리에게 조용히 말해 준다. 경계에 서 있으면 불안하다. 불안이 사람을 고도로 예민하게 유지해주고, 그 예민성이 경계가 연속되는 흐름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감지능력을 우리는 흔히 ‘통찰’이라 부른다. 세계의 흐름을 단순히 이성적인 계산능력만이 아니라 감성, 경험, 욕망, 희망 등 모든 인격적 동인들을 일순간에 함께 발동시켜 판단해버리는 능력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오는 고도의 불안을 감당하며 키워낸 예민함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경계에 서 있는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딱 거기까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쪽을 선택한 후, 그 세계에 자신만의 선한 왕국을 건설하고 그것을 세계의 전부로 착각해 버린다. 한 쪽을 선택해 거기에 빠지는 것은 곧 그 프레임에 갇혀 굳어버리는 일이다. 세계를 참과 거짓, 선과 악으로만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자신의 관점에 맞는 것만 참이고 선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고 악이다. 이 관점이 바로 이념이고 신념이고 가치관이다.


     변화 ‘주장’하면 이념이 될 수도

     세계는 변한다. 세계는 한 순간도 멈추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파르메니데스나 플라톤의 순수혈통을 받은 후예라 할지라도 이 변화의 진실을 부정하지는 못하리라. 변화는 흐름이다. 흐름은 경계가 지속적으로 중첩되는 과정이다. 변화를 긍정하면서 경계의 중첩이 세계의 진실임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흐르는 것은 부드럽다. 변하는 것은 유연하다.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죽어 있는 것은 뻣뻣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변화를 실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변화가 멈추고 화석화 되는 것은 죽는 일이다.


     산 자의 부드러움을 정지시켜 딱딱하게 굳도록 하는 것이 이념이나 신념 같은 것들이다. 바로 경계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한 쪽을 선택해 남겨진 것들이다. 모든 이념은 한 쪽에 서 있다. 경계성의 흐름을 관념으로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념이나 개념은 세계를 한 쪽으로 정지시키는 기능을 하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사유의 근본정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의식과 제도도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변화가 ‘주장’이 되는 순간 이상하게도 변화의 동작은 멈춰지게 된다. 변화가 관념이나 이념이 되는 순간, 변화는 ‘변화’라는 간판만 달린 화석이 된다. ‘변화’를 경계에 서서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쪽에 서서 ‘주장’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변화라면, 즉 경계의 중첩이라면, 이제 이 흐름을 어떻게 흐름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흐름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승리자다. 왜냐하면 흐름을 그 흐름 그대로 마주하는 사람만이 변화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세계 흐름에 반응하는 사람은 승자가 되고, 그 흐름에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패자가 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패배자가 되더라도 나는 내 신념을 변화시키지 않겠다는 것은 장렬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깊게 박힌 말뚝 같거나 딱딱한 시멘트 콘크리트처럼 오히려 사람들의 왕래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고집이거나 완고함이거나 추태이다.


     무생물은 변화가 멈춘 존재다. 경계의 중첩이 끊겼다. 생물은 변화 자체다. 생명은 경계의 중첩이 흐르고 또 흐르는 과정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생명체에게 불사의 능력을 주는 스틱스 강물은 우리에게 단호한 한 마디를 전한다. “경계에 서라! 그래야 흐를 수 있다! 그래야 산 자다! 그래야 강하다!” 나룻배를 스쳐가는 물결의 흐름이 가만히 어루만져 주는 것을 느끼며 받았던 10대 소년의 위안에도 이런 근거가 있었던 모양이다.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80~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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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말새몸짓 활동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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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본학교2기의 음악수업이 지난 토요일(25일) 함평 호접몽가에서 있었습니다. 

    • 이번 강의에서는 "그 여름의 끝"라는 주제로 1811년부터 1820년까지 작곡된 베토벤 음악에 대한 내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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