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말새몸짓 뉴스레터 #025] 더 높은 지식에 대한 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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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더 높은 지식을 갈구합니까? 더 높은 지식을 갈구해야, 내가 더 수준 높은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새말새몸짓 뉴스레터 #025 2021.11.22
(*ep.17편의 내용을 발췌합니다. ) 왜 더 높은 지식을 갈구하는가? 우리는 보통 어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둘 사이에 있는 수준의 격차를 무화시켜서 둘을 평등하게 볼 수 있고,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것을 굉장히 수준 높은 지성적 태도라고 보지만, 저는 이것을 지성적 태도라고 보지 않고, 저는 지성의 폐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지성적인 태도는 ‘반도체칩이 더 높고, 포테이토칩은 더 낮다. 통제력과 영향력 면에서 둘 사이에 격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사유를 진행시키는 것. 저는 이것을 지성의 높은 단계, 지적인 태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세계와 관계할 때, 세계를 사실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혹은 독립적으로, 주체적으로 자세히 어루만지는 일을 하기 전에 자기만의 고유한 인식의 냄새를 만들어 내기 전에,이 세계가 높낮이가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어떤 당위적 전제를 먼저 사용하면, 그 사람의 영혼과 지성적 높이는 절대 상승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반도체칩은 포테이토칩보다 높아졌는가? 포테이토칩은 반도체칩보다 힘이 더 작아졌는가? 간단합니다. 반도체칩을 만들 때 적용되는 지식과 이론이 포테이토칩을 만들 때 적용되는 지식과 이론 보다 더 높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지식은 높낮이가 있습니다.지식은 같은 레벨이서 함께 더불어 따뜻하게 어깨동무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식은 더 높은 지식과 더 낮은 지식으로 갈립니다. 우리가 쉽게 이야기했듯이 연산보다는 대수가 높습니다. 더하기 빼기 보다는 삼차 방정식이 높습니다. 지식에는 높낮이가 있다. 이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높은 지식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왜 더 높은 지식을 갈구합니까? 더 높은 지식을 갈구해야, 내가 더 수준 높은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갑니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왜 올라갑니까?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는 왜 갑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에 왜 갑니까? 이 일련의 과정은 전부 더 높은 지식을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은 높낮이가 있습니다. 더 높은 지식을 갈구 하는 것은 더 높은 인격, 더 아름다운 인격을 갖게 할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인간은 이 세계를 소유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세계를 갖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세계를 어루만지는 존재입니다. 이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어루만진 것, 자기가 해석한 것, 자기가 인식한 것을 소유할 뿐입니다. 지성은 세계를 지적으로 어루만지고, 자세히 보고, 살피고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지.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루만져 놓은 결과나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을 자기 생각으로 착각해서 자기 스스로 어루만지는 일, 자기 스스로 해석하는 일, 자기 스스로 곰곰이 생각하는 일, 자기 스스로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을 하지 않고, ‘먼저 이 세계를 정치적이고, 도덕적 관념을 가장 앞세워서 반도체칩과 포테이토칩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수준 차이가 없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평등하다.’라는 정치적 관념을 먼저 적용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왜 안 되느냐? 자기한테 아무 이익이 안 돼요.자기를 한 곳에 고정시키는 대못의 역할 이외는 할 것이 없어요. 반도체칩과 포테이토칩 사이에는 분명히 높낮이, 즉 수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은 그것들을 만들 때 적용되는 지식과 이론 사이에 수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더 높은 지식을 구하려고 항상 노력해야 하는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진석, <생존철학>ep_17 중에서 *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맞이한 현대입니다." (중략)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그의 저작 《니체와 철학》에서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니체가 바로 현대라는 것이죠. 니체가 왜 현대입니까? 그는 근대 이성을 계산적 이성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우주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이성은 정신으로 존재하고 의지는 육체로 존재하죠. 근대가 이성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비이성, 즉 ‘육체성’의 시대입니다. 마르크스의 사회 경제적 조건도,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도, 니체의 의지도 모두 육체성입니다. 육체성은 바로 구체성입니다. 인간 존재의 근거가 이성 대신에 욕망으로 설명되면서 우리의 현대는 시작됩니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하여 공통의 비율과 공통의 계산력을 사용하지요. 그래서 집단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을 욕망의 존재로 이해하면서 인간에게는 점점 물질(육체)이 더 근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욕망은 집단보다는 개별자에게서 더 분명히 확인되죠. 육체성을 통해서 인간은 ‘각자’가 됩니다. 그래서 세계는 이제 집단적 통합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적 융합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할 것입니다. 현대에서는 세계를 해석할 때 사유보다는 무시되었던 경험이 새롭게 부각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사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경험이 부각되는 시대로, 이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감성이 중시되는 시대로, 정신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던 시대에서 육체 혹은 욕망이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이죠. 집단에서 개별로, 보편에서 특수로, 본체에서 현상으로 건너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우리가 맞이한 현대입니다. 최진석,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위즈덤하우스, 2015, 180~181쪽. ** 새말새몸짓 활동을 소개합니다. * 현재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2기 모집절차는 2차 에세이까지 접수를 받고 현재 심사중에 있습니다. 회원님들께 2차 문제를 소개합니다. *다음 네 가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 A4 용지 한 장 분량으로 한 편의 글을 완성하시오. 1. 운동과 정지 2. 완전과 불완전 3. 고통 4. 안정과 불안정 회원님들께서 수험생입장이라면, 어떤 것을 선택하셨을까요? (사)새말새몸짓 홈페이지에서는 새말새몸짓의 활동을 소개하고 참여하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늘 새말새몸짓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아울러, 저희는 비영리법인으로 후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새말새몸짓 회원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원내역은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새말새몸짓 www.nwna.or.kr | newwordnewattitude@naver.com 서울시 서초구 청계산로 207(신원동, 신일해피트리앤), 501호 수신거부 Unsubscri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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