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진정한 앎은 어떻게 찾아가야 합니까?
학(學), 즉 배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방한다는 거예요. 이미 있는 것을 흡수하고 거기에 자기를 맞추는 거지요. 이런 방식으로는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기 힘들어요. 언제나 모방하고 따라야 할 대상을 추구해야 하니까,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설 수 없는 구조지요. 항상 외부의 모델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면 근심과 혼란이 끊이지 않습니다. 배움의 궁극적인 목적이 뭘까요? 자기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를 알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이 진정한 배움의 길이죠. 모방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삶을 정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모범으로 정해놓고 그것을 추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학의 방식을 취하게 되면 자기 삶에 자기가 없고, 다른 삶이 자기 삶으로 들어와서 내 삶이라고 자꾸 착각하게 만들죠. 저는 젊은이들이 남의 삶을 모방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한 번쯤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덩달아서 배움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왜 배우는 거예요? 잘사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죠. 그럼 잘사는 주체는 누구죠? 바로 자기 자신이죠. 자기가 잘사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삶의 방법을 찾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잘 산 다른 사람의 삶을 따라 하기 위해서 배우는 경우는 너무도 많아요. 그럼 잘 살려면 자기의 삶을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이것이 분명해야 해요.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는 거죠. ‘자신을 향해 걷는 삶’을 살면 그냥 낭만적인 충족감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을 향해서 걷는 삶이 현실적으로도 큰 성취를 이루게 하죠. 왜냐하면, 이 세계에 등장한 것들 가운데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질문의 결과들이죠. 질문은 자신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튀어나오는 활동이죠?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대답은 타인이 만든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품었다가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일이라서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을 만든 타인들에게 주도권이 있죠. 이런 의미에서 세상에 등장한 모든 것은 자신을 향해 걷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죠.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냥 낭만적인 충족감만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인 큰 성취까지도 보장하죠. 절학(絶學)은 배움을 끊는다고 해석되지만, 배움을 부정한다기보다는 모방하는 배움의 태도에만 빠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추종하고 모방하고 따라 하는 배움 너머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작동하는 질문하는 배움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렇듯 절학의 태도를 갖고 성장한 인재들이 많은 사회가 더 건강하고 자유로우며 풍요로워진다고 믿어요. 모방하고 따라 하는 배움에만 빠지면, 그 시대에 해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 거기에 몰두하기보다는 자신이 배운 이념이나 내용에 그 시대를 적응시키려는 무모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근대 제국주의가 동아시아를 침략해 올 때 일본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라는 사람이 야마구치[山口]의 하기[萩]시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작은 학교를 세워요. 거기서 2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90여 명의 인재를 길렀는데 혁명 과정에서 반이 죽고 반이 살아남아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죠. 이 젊은이들이 일본의 근대를 엽니다. 그때 조선에는 3백 개 이상의 향교와 서원이 있었어요. 여기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지요. 그런데 이 많은 젊은이들이 요시다 쇼인이 그 짧은 기간에 그 손바닥만 한 학교에서 길러낸 인재들을 당하지 못하고 조선은 식민지가 돼요.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요? 쇼카손주쿠에서는 공부를 했어요. 그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분명했지요. 반면에 조선의 향교와 서원에서는 공자와 맹자를 이은 주자학만을 공부했어요. 공자 왈 맹자 왈만 읊고 있었던 겁니다. 시대의 급소를 잡고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가 처한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찾아서 공부한 사람들은 일당백이 되고,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은 속절없이 나라를 잃었지요. 정해진 무엇을 모방만 하는 공부를 한 사람들은 이후 얼마나 근심이 컸겠습니까. 반면에 시대의 급소를 잡고, 정해진 것을 모방하는 학을 끊고 자기 안에서 자발적으로 등장하는 의지의 길을 따라서 자발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자신과 나라를 모두 살리는 사람들이 된 거죠. 공부를 할 때 무엇을 습득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왜 습득해야 하는지 각성하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에서 궁극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까지 제기돼야 해요. 젊은이들이 각성하고 자각하는 힘 없이 정해진 내용을 숙지하는 학습만 계속해서는 강한 자기, 부강한 나라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최진석, 『나 홀로 읽는 도덕경』, 시공사, 2021, 106~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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