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기존의 '나'를 죽여야 새로운 '나'가 드러난다
인격의 문제를 매우 깊게 제기한 장자는 『장자』 「대종사(大宗師)」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사람이 있고 나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 (유진인이후유진지有眞人而後有眞知) 참된 지식은 이 세계를 제대로 반영해주는 진실한 지적 체계다. 인격적으로 참되지 않으면 참된 지식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열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지적인 통찰을 발휘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건립하거나 창의적인 관점을 제기하는 일 등은 모두 그럴만한 인격이 갖추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같은 환경에서 자라고, 같은 교육을 받고, 비슷한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그냥 평범한 학자로 남고, 어떤 사람은 인류에게 빛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등극한다.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어서 이렇게 달라지는가? 결국은 ‘사람’의 차이다. 인격의 차이다. 인류에게 빛을 보여주는 참된 지식의 생산은 그럴만한 인격적 함량을 가진 바로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모든 일들이 다 그 일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의 크기와 깊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누가 참된 사람인가? 장자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는 『장자』 「제물론(齊物論)」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스승 남백자기(南伯子綦)에게 안성자유(顔成子游)라는 제자가 있었다. 안성자유가 어느 날 자기 스승을 보니 앉은뱅이책상에 기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예전과 사뭇 달라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선생님 모습이 예전과는 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르냐고 스승이 물으니, 제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모습이 꼭 실연당한 사람 같습니다.”
실연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가? 일단 어깨가 축 처진다. 짝을 잃은 사람은 불 꺼진 재나 마른 나무처럼 풀기가 없이 무너져 내린다. 다 타고난 재는 불이 꺼진 후 겨우 형태만 남아 있다가 손만 대면 으스러진다. 안성자유가 봤을 때 예전의 스승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 온전한 자기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실연당한 사람처럼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남백자기가 제자를 칭찬하면서 말한다. “안성자유야, 너 참 똑똑해졌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냐?”
그러고는 분명한 어조로 결론을 맺듯이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 (오상아(吾喪我)) 나는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는 이 말을 좀 더 직설적이고 자극적으로 표현하고자 ‘자기살해’라 한다. 똑똑하건 똑똑하지 않건 모든 사람은 다 각자 세계를 보는 나름대로의 시각, 즉 이론과 지적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기준으로 세계와 관계한다. 그 이론이나 지적 체계들, 가치관이나 신념이나 이념들은 사실 생산되자마자 부패가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그 부패되고 있는 시념이나 이념을 매우 강력하고 분명한 가치관으로 신봉하면서 그것으로 무장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가치관들로 채워져 있는 가치의 결탁물이다. 장자는 가치의 결탁물인 자기를 ‘아(我)’로 표현하고, 가치의 결탁을 끊고, 즉 기존의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 태어난 자기를 ‘오(吾)’로 새겼다. 가치관으로 결탁된 자기를 살해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날 수 없다. 자기살해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한다. 참된 인간을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무아(無我)’도 글자 그대로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자기로 등장하는 절차다. 그래서 무아는 ‘진아(眞我)’와 같아진다. 진인으로 새롭게 등장한 달지 진아로 우뚝 서는 일을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그것을 반성이라고도 하고, 각성이라고도 하며,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자기살해 이후 등장한 새로운 ‘나’, 이런 참된 자아를 독립적 주체라 한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21세기북스, 2018[2017], 214~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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