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관찰과 몰입을 부른다. 독립적인 인간은 대답에 빠지지 않고 질문한다.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각자의 내면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그런데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 세계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고 자신에게만 있는 매우 사적이고 비밀스럽고 고유한 것이다. 이것이 내면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질문이다. 독립적인 인간은 자신을 오로지 자신에게만 있는 힘 위에 세운다. 정해진 어떤 이론이나 가치관, 어떤 질서에도 양보하지 않고 오직 자기를 자기이게만 하는 것 위에 서 있을 때, 이 사람을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한다. 이때 발휘되는 그 사람만의 힘이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그런데 대개는 궁금증과 호기심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신념이나 이념이나 가치관을 근거로 판단한다. 예를 들어 여기 물컵이 있다고 하자. 내가 “이 물컵을 보세요!”라고 말하면, 다들 바라보는 동작을 취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 물컵 자체를 보는 사람은 적다. 아니,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물컵을 보려면 판단하지 않고 보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의 시선을 물컵에 직접 가져다 붙일 수 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 물컵을 보지 않고 그냥 ‘저것이 물컵이지’라고 판단한다. 시선을 물컵까지 가져다 붙이지 못하고, 중간에 ‘물컵이지!’하고 판단해버리고는 시선을 이내 거두어들인다. 이렇게 시선을 중간에서 거두어들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본다’ 혹은 ‘봤다’고 말할 수 없다. 극소수의 어떤 사람은 시선을 물컵까지 갖다 접촉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이 정도만 되어도 사실은 매우 대단하다), 물컵에 접촉한 시선을 바로 거두어들이지 않고 거기에 오랫동안 머무르게까지 할 수 있다. 이 단계를 우리는 ‘관찰’이라 한다. 모든 학문 활동이나 삶 속에서 더 높은 단계로 상승하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관찰의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호기심이 큰 사람은 관찰을 하고, 호기심이 작은 사람은 하지 못한다. 관찰을 유지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집요함이고 몰입이다. 인생의 승패는 자신을 이 몰입의 단계까지 집요하게 끌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좌우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휘하여 진실하게 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집요한 관찰을 통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몰입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아주 높은 단계다. 익숙함이 생소해지는 순간의 번뜩임 대상에 대한 관찰이 집요해지면 그 대상도 무너지고 관찰하는 자신도 무너지는 단계까지 내몰린다. 익숙했던 대상에서 갑자기 생소함과 낯섦 앞에서 순간 당황하고 깜짝 놀란다. 이 ‘깜짝 놀람’의 순간에 비로소 철학적 시선이 작동한다. 시적 상상력과 철학적 ‘깜짝 놀람’이 교차한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새로운 관계를 절제된 언어로 정련하며서 한 편의 ‘시(詩)’가 태어난다. 「섬」이라는 시를 보자.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 머릿속에는 분명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무엇인가가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거대한 흙덩어리다. 그런데 시인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섬과는 전혀 다른 섬을 턱! 하니 가져다준다. 섬이라고 하는 거대한 흙덩어리를 지탱하는 물이 시인의 눈에는 울타리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 물이 우리를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게 할 수 있으니까 울타리인 셈이다. 그런데 울타리를 일반적으로 사람의 키보다 더 높이 세워져 통행을 막으려는 것인데, 이 시인이 말하는 물 울타리는 또 막는 역할을 하지 않고 오히려 길이 되어준다. 함민복 시인은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 섬을 ‘판단’한 것이 아니라 섬을 제대로 ‘본’ 것이다. 게다가 섬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동시켜 자신의 시선을 그곳에 갖다 붙였다. 시선을 갖다 붙인 다음에는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도록 했다. 관찰을 한 것이다. 또 집요하게 관찰력을 유지했다. 관찰력이 집요하게 발휘되면서 ‘시인’도 ‘섬’도 달라졌다. 원래의 ‘시인’도 무너지고, 원래의 ‘섬’도 무너졌다. ‘시인’과 ‘섬’은 서로에 대하여 익숙함을 벗고, 생소한 느낌을 매개로 마주섰다. 마침내 시인은 전혀 새로운 섬을 생산했다. 물 울타리를 두르고 울타리가 가장 낮고 울타리가 모두 길이 되는 섬은 인류 역사에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다. 최초의 섬이자, 유일하고도 고유한 섬이 탄생했다. 철학은 ‘경이’로부터 시작된다 ‘창조’란 바로 이런 것이다. 창조적 차원의 사유가 발동될 때, 가장 근저에서 먼저 꿈틀대는 것이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인간을 가장 독립적으로 만들고 고독을 자초하게 한다. 고독하고 독립된 상태에서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힘, 그것이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이것이야말로 탁월함으로 인도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지닌 채 진실하게 보고 집요하게 관찰하면, 대상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며 흔들리다. 이때 이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던 생소함이 등장하고, 그러면 깜짝 놀라게 된다. 그것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이(Thaumazein)**’라고 했다. 고독을 자초하는 독립적 주체가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지고 어떤 것을 집요하게 관찰하면 그것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관찰자는 심리적으로 동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경이’다. 경이는 익숙함과 결별하는 확실한 신호다. 독립과 고독은 이때 완성된다. 모든 철학서에 철학이 경이로부터 시작된다고 쓰여 있는 이유다. 경이로움 속에서는 가장 익숙했던 것이 가장 생소해진다. 신의 음성이 가장 익숙한 시대였지만, 탈레스에게는 신의 음성이 갑자기 어색하고 생소해졌다. 이 생소함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혁명적 관점이 제기될 수 있었다. 인간의 능력은 신의 은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믿음이 가장 익숙한 세계관이던 시대에, 베이컨에게는 갑자기 그 세계관이 어색해졌다. 이 어색함으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낳게 되었다. 인간의 능력은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정확히 아느냐가 결정한다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독립적 주체로 선다고 했을 때 그 독립은 강제적으로나 수동적으로 맞이할 수 없다. 스스로 해야만 한다. 고독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즉 기존의 지식과 이론에 근거해서 대답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모든 것들과 결별하고 낯설어지는 실험을 감행한다. 철학은 여기서 출발한다. * 함민목, 「섬」,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12년, 97쪽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시초를 '타우마제인'이라고 했는데, '타우마제인'은 '놀란다'는 뜻으로 사물에 대한 지적 경이감을 뜻한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21세기북스, 2018[2017], 186~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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