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해와 달을 품다 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운행하는지를 파악하고 거기에 대응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게 합니다. 노자는 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또 어떻게 운행하는지의 원칙을 유무상생으로 파악하고, 거기에 억지로 글자를 붙여 ‘도’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노자의 사상 안에서 가장 이상적인 행위는 바로 ‘도’를 근거로 하거나 ‘도’를 본받아서 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도덕경》 제21장에 “공덕지용 유도시종(孔德之容 惟道是從)”이란 구절이 나옵니다.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덕’이라 함은 정치 행위, 윤리적 행위, 인식적 행위, 앎의 행위 등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활동, 가장 훌륭한 삶, 가장 훌륭한 정치 행위, 가장 훌륭한 지적 활동은 오직 ‘도’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노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또 바로 이어서 “도지위물 유황유홀(道之爲物 惟恍惟惚)”이라고 말합니다. 도라고 하는 것은 황홀하여 헤아리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문장 안에서 황(恍)이나 홀(惚)은 모두 흐릿하여 알 수 없는 모양을 표현하지요. 노자는 황 자 하나만 쓰든 홀 자 하나만 쓰든, 혹은 황자를 겹쳐 쓰거나 홀 자를 겹쳐 써도 될 터인데, 굳이 황자와 홀 자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문장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죠.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홀하고 황하구나! 그 안에 형상이 있다. 황하고 홀하구나! 그 안에 실정이 있다. 여기서는 홀 자와 황 자를 문장에 따라 다른 순서로 배치하며 교차시키기까지 합니다. 황 자나 홀 자나 모두 미묘하고 흐릿하여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하는 것은 같지만, 황은 너무 밝아 눈이 부셔서 흐릿해진 상태이고 홀은 어둠 속에 있어서 흐릿해진 경우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 두 글자의 의미 차이를 부각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노자가 밝음과 어둠을 교차시키는 수사법을 쓴다는 사실입니다. 최소한 밝음과 어둠을 중첩시키기까지는 한다는 것이죠. 여기서 ‘미묘하고 흐릿함’이라는 최종적인 의미를 밝음과 어둠의 교차로 표현하는 노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들이 모두 세계가 대립면의 꼬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어요. 세계는 이렇게 대립면의 꼬임으로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세계가 본질을 근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는 한, 세계에 관계하는 방법 또한 관계적 능력에 의거해야 할 것입니다. 《도덕경》 에서 노자는 세계각 존재하는 형식인 ‘도’를 현이나 새끼줄[繩]을 가지고 묘사하지요. ‘현’도 대립면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상호 뒤섞여 있는 모습이고, 새끼줄은 대립면의 두 가닥이 꼬여 있는 모습이지요. 모두 관계적 존재론을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그럼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어때야 할까요? 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지(知)’의 방법이 아니라 ‘명(明)’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해와의 관계 속에서, 해를 달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지요. 해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은 해와 달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지’라고 합니다. 반면 해와 달을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하는 것을 ‘명’이라고 하는데, 달과 해가 존재적으로 따로따로 분리된 두 개로 존재한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한 벌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죠. 해와 달을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통찰입니다. 최진석,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위즈덤하우스, 2015, 191~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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