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시가 잘 써지지 않는 까닭 왜 시(詩)가 잘 써지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어느 시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시가 잘 써지지 않는 이유는 ‘시’를 쓰려 하기 때문이다. 이미 누구에게나 공유된 형식의 ‘시’를 쓰려고 덤비는 한, 그 사람은 자기에게 입력된 기존의 시적 형식을 구현하느라 허겁지겁하기만 한다. ‘시’에 자신을 맞추기 바빠 자신에게 ‘시’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시’가 주인이 되어 버린다.
시란 본시 고유한 자신이 영글고 영글어서 혹은 다치고 다쳐서 안에 갇혀 있지 못하고 세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튀어나온 자신을 시가 다가와 영접하는 것이지, 그렇게 하여 시인이 되는 것이지, 이미 있는 시에 끼어들어 한자리 차지하려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인이 되는 일은 자신을 시처럼 가꾸는 일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시 아닌 곳으로 자폐하여 시를 멀리하고 스스로를 맷돌 삼아 거기에다 자신을 갈고 또 갈다 보면 몇 방울의 피아 엉겨 붙는다. 그 피들을 긁어모아 놓으니, 거기에 시라는 이름이 다가와 걸릴 뿐이다. 설연 시가 아니어도 된다고 포기한 채, 자신을 학대하다 보면 오히려 빛나는 시가 태어난다. 진짜 시인일수록 그 사람은 꼭 자신의 시를 닮았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토해지는 것이 때문이다.
적어도 시라는 장르에서만큼은 시가 주인이 아니라 시인이 주인이다. 시가 생산되는 기능에 갇히는 한, 시는 없고, 시인은 태어나지 못한다. 미성숙한 사람은 시적 기능에 빠져 헤매다가 자신을 시처럼 가꾸는 일에 태만하여 시를 닮지 못하고 결국 시인이 되는 길에서 좌절한다. 그래서 시인의 좌절은 인간의 좌절이다. (중략)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217~21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