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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뉴스레터 #038] 외우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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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관리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056회   작성일Date 22-03-06 21:52

    본문

    외우기는 나를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틀을 깨고 나올 힘을 갖도록 단련시킨다. 내가 창의성 곁에 외우기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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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말새몸짓 뉴스레터 #038
    2022. 0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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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외우기의 힘>이란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창의성을 강조하는 이때에, 외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한번 아래에서 살펴보시죠. 

    •  <생존철학>은 30편의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이 편에서는 '생각은 행동을 교정하는 의식의 전략적 활동'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영상과 글을 함께 소개합니다.  

    • 이번 한 주도 늘 한 걸음 더 나은 삶으로 건너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외우기의 힘

     

     나는 외우기를 강조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경전이나 문장은 외우어야 내 것이 되기 쉽다. 어느 기자는 나에게 ‘창조 인문학 전도사’라는 간판을 달아 주었다. 이제는 ‘무엇’을 전하는 일보다 전할 가치가 있는 것을 생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살다 보니 ‘전도사’라는 명칭이 어색했지만, 지금은 인문학적 높이의 활동이 갈급한 시대라서 이 정도 간판이라면 감사히 받아들인다. 이쯤에서 가끔 시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창조나 창의를 전도한다면서 외우기를 강조하니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 나누기를 할라치면 수만 가지 기준이 있을 것이다. 시(詩)를 가지고도 나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범박하게 보자면 사람은 시를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으로 가를 수 있다. 둘 사이 차이는 크다. 시를 읽더라도 내면의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내면의 충격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통해서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감행하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또 큰 차이가 난다. 이런 차이들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육화(肉化) 정도의 차이다. 그런데 육화의 길에 바로 외우기가 한 자리 차지한다.

     

     이리하여 사람은 다시 시를 외우는 사람과 외우지 않는 사람으로 나뉜다. 시를 외우면 시인이 시를 타고 침투해 들어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히려 더 커져서 시를 지배할 수 있다. 시의 석양 같은 운명이다. 내가 외운 시로 시인이 내 안에서 영역을 확대하기 보다는, 시인 몰래 내가 자라 버린다. 무엇보다 시를 지배하는 인간이 가장 상급이다.

     

     10~20년 전부터 관공서나 기업이나 학교 등등의 기관에 ‘창의’ ‘상상’ ‘창조’ ‘선진’ ‘선도’ 등과 같은 구호가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구호를 담은 현수막은 결핍과 희망을 동시에 말한다. 없으니 가져 보자는 선동이다. 이렇게 현수막을 높게 달아 놓고 긴 시간 펄럭였지만, 지금 우리가 창의적인가.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창의력을 발휘하자고 그렇게 강조했지만 왜 아직까지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가. 혹시 접근이 잘못되고 있어서가 아닐까?

     

     창의력은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발휘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어떤 창의적인 결과들도 ‘바로 그것’을 발휘하려고 의도해서 나온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세계를 향해 자신을 표현하려는 강한 충동이나 자신에게 등장하는 문제점을 깊이 파고들다가 그냥 펼쳐진 것들이다. 대답의 결과가 아니라 깊고 긴 질문의 결과들이다. 정답을 찾기보다는 마치 늪에 빠진 사람처럼 자기만의 문제에 집착한 결과다. 돈오의 깨달음처럼, 축적된 내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그래서 창의력은 발휘할 수 있는 어떤 기능적인 활동이 아니라, 내면의 깊숙한 곳에 연결되어 있는 인격의 힘이다. 사회적으로 창의성이 발휘되고 있지 않다면, 그건 분명히 창의력이 튀어나올 정도의 인격적인 준비가 된 사람들이 드물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창의적이지 못하다면, 창의적인 두께의 인격을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이다.

     

     창의성이 필요하다면, 창의성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당연히 인격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단련된 내면을 갖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놀이나 공상에 빠지기나 지루함을 견디기나 예민한 감각이나 운동이나 글쓰기나 낭송 같은 것들이 오히려 창의력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활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외우기도 이런 것들과 함께 큰 몫을 한다. 창의성은 축적되고 단련된 내면의 폭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창의력은 지식을 축적하는 일로 길러지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들 창의성을 지식의 축적과 반대되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렇다고 하여 지식의 축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축적된 지식의 양은 분명히 창의성의 수준에 영향을 미친다. 문제는 지식이 ‘나’의 내면을 단련하는 일에 사용되었느냐, 아니면 내가 오히려 축적된 지식의 관리자로만 남았느냐다. ‘나’를 놓치지만 않으면 된다. 지식의 인격화가 관건이다. 외우기는 나를 틀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틀을 깨고 나올 힘을 갖도록 단련시킨다. 내가 창의성 곁에 외우기를 함께 두는 이유다.


    최진석, 『경계에 흐르다』, 소나무, 2017, 177~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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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 30편의 내용 일부를 발췌합니다. )
     

    생각은 행동을 교정하는 의식의 전략적 활동

            
         

     안녕하세요? 최진석입니다. 

     또 반갑습니다. 저만 여러분들을 반가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매우 반갑습니다. 생각에 대해서 계속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생각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얘기했으면 좋겠다. 왜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느냐’라는 불만도 예상이 됩니다만, 제 인식으로는 생각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결하게 이야기하는 능력이 아직은 좀 부족해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참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은 다양한 형태로 작용하죠. 그런 의식의 활동 가운데 자신의 삶을 더 좋은 삶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다양한 전략을 펼치는데, 특히 이 전략을 펼치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개입됩니다. 그래서 생각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미리 생각을 또 다른 하나의 관점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꾸려 나가는 다양한 전략을 펼치는데, 내 의식을 그냥 의식의 흐름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교정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활동. 이것을 생각이라고 말해 보겠습니다.

     

     좀 더 줄여서 말씀을 드려본다면, 행동을 교정할 수 있는 의식의 전략적 사용. 전략적 활동. 이것을 생각이라고 해 봅시다.

     

     제가 또 어떤 다른 글에서 쓴 내용입니다. 물고기들을 비유해서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물고기들이 친구들끼리 모여서 물속에서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면을 뚫고 미끼를 단 낚싯바늘이 내려옵니다. 그 중에 어떤 물고기 친구가 그것을 덥석 뭅니다. 그리고는 수면 밖으로 달려 올라갑니다. 다시는 내려오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낚싯바늘이 미끼를 달고 또 내려옵니다. 이때 대부분의 물고기들은 그 미끼를 단 낚싯바늘을 다시 덥석 뭅니다. 그리고 수면 위로 달려 올라가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습니다. 이때 물고기들 가운데 생각이 있는 물고기가 한 마리 있다면, 그 물고기는 ‘친구가 저것을 물더니 수면 밖으로 달려 올라가서는 다시는 내려오지 않더라. 그러니까, 나는 이제 저 미끼를 물지 않아야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자신의 습관적인 행동방식을 교정합니다. 그래서 미끼를 무는 습관에서 교정해서 다시는 물지 않는 습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생각이 있으면 자신의 의식을 의식의 흐름에 맡기지 않고, 자신의 삶의 전략을 펼치는데 사용합니다. 그래서 행동을 교정하여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들은 말씀 하나 옮겨드리겠습니다. 공산주의를 읽기만 한 사람은 공산주의를 끝까지 추종한다. 그런데 공산주의를 이해한 사람은 공산주의를 끝까지 추종하지 않는다. 이 공산주의를 자본주의라고 바꿔도 되고, 자유주의라고 바꿔도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서 다루는 일은 피하도록 합시다.

     

     이 문장만 보도록 하죠. 공산주의를 읽기만 한 사람은 왜 끝까지 추종할까요? 그것은 생각을 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를 이해한 사람은 끝까지 추종하는 일을 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행동을 교정할까요? 그것은 생각을 하면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의 전략과 연결시켜서 읽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과 전략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그 내용을 하나의 진리로 오해하고, 거기에 자신을 모두 맡기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자신의 삶의 전략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전략을 개입시키는 생각을 한 읽기’는 그 사람을 바보로 만들지 않고, ‘자신의 삶의 전략을 개입시키는 생각을 한 읽기’를 하는 사람은 이해를 하게 되서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게 됩니다.

     

     저는 갑골문을 공부하면서, 갑골문에 ‘갑이 거북이 껍질이다, 거북이 가죽이다’하는 것을 알고서는 그걸 저도 모르게, 거북이 등껍질로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거북이 등껍질에 글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거북이 뱃가죽에다가 글씨를 새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한참 지나서까지도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거북이 등껍질에다가 새긴다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또 그렇게 제가 한동안 이야기를 하기도 했어요. 이 갑골문은 중국 고대 은나라때 유물이거든요. 제가 고대 중국 은나라의 수도터인 은허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상당히 많은 양의 갑골문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그 유물이 당연히 거북이 뱃가죽일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것을 등껍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얼마나 바보 같습니까. 저는 갑골, 즉 구갑우골(龜甲牛骨). 거북이 껍질과 소의 견갑골이라는 뜻인데요. 이 거북이 껍질이라는 구갑을 저는 저 혼자 거북이 등껍질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갑골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갑골을 읽기만 한 것이겠죠. 이것이 교정되는 데 상당히 시간을 많이 썼습니다.

     

     이 경험으로 봐서도 우리가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해서 행동을 교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어려움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최진석, <생존철학>ep_30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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