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인간은 생각으로 문명을 건설한다. 함석헌 선생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하시면서 생각이 핵심임을 갈파해주셨다. 함석헌 선생은 또 말씀하셨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뜻도 없다. 생각하지 않아서 뜻이 흐트러지면, 어떤 일이라도 다 흐트러진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그 사람의 생각과 뜻이 어떠한가가 결정한다. 그 부자가 어떤 부자인가는 그가 소유한 부의 규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를 다루는 생각과 뜻의 크기가 결정한다.
그 권력자가 어떤 권력자인가는 그에게 허용된 권력의 강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을 다루는 생각과 뜻이 결정한다. 그 지식인이 어떤 지식인가도 그가 가진 지식의 질과 양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지식을 어떤 생각과 어떤 뜻으로 다루는가가 결정한다.
결국 세상사 모든 일은 최종적으로 생각과 뜻이 결정한다.
정치는 생각과 뜻의 수준이 그대로 반영되는 문제 해결 장치이자 군집 생활을 하는 인간이 행하는 하나의 종합예술이다. 정치가 꽃인 것이다. 정치 구성원들에게 생각하는 능력과 뜻이 잘 단련되지 않아 꽃을 잘 피우지 못한다고 해서 정치가 꽃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인간은 정치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진화했다. 피워낸 꽃의 모습이 정원사의 실력이듯이, 한 나라의 정치에는 그 나라 국민들의 실력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런 이유로 국가의 맨얼굴은 사실 정치다. 우리는 이제 BTS도 가졌고, 반도체도 가졌고, 오징어 게임도 가졌다. 이들이 우리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고 있다. 경제규모도 신생 독립국으로 출발한 나라가 이룬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러나 BTS, 반도체, 오징어 게임, 경제규모는 우리의 맨얼굴이 아니다. 그것들이 정치를 흔들 수는 없지만, 정치는 그들을 흔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맨 얼굴은 정치다.
도쿄에 지하철이 생긴 해가 1927년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1913년에 생긴다. 당시에는 지하철이 산업의 종합판이었음을 감안해 보면, 아르헨티나의 경제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900년대 초에는 아르헨티나가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 잘 살았다. 세계 10위~8위 하던 나라가 이제는 후진국에 속하게 되었다. 정치가 경제를 망친 결과다.
아마 포퓰리즘이라는 말도 아르헨티나에서 나왔을 것이다. 정치가 한 나라의 맨얼굴임을 알 수 있다. 기업이 실수를 해서 야기한 손해도 작지 않지만, 국가가 정치를 잘못하여 제도적으로 끼치는 손해는 기업이 야기한 손해정도는 애교로 봐줄 정도로 크다. 그래서 정치가 혼란스러우면 아무리 큰 경제 규모도 쉽게 무너지는 것이다.
모든 나라의 패망은 정치의 혼란 때문이다. 정치로만 스스로 무너진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망하는 경우는 없다. 거의 대부분은 망해가는 걸 목도하면서 망한다. 존재하는 어떤 것도 외부의 것에 의해서 망하는 것은 없다. 스스로 망하는 길을 가다가 외부가 자신을 망하게 하도록 허용하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 망해가는 전 과정은 정치적 형태를 띤다. 국가가 기능적 레벨에서 성장하여 한계에 도달하면, 바로 기술적 레벨로 상승시키거나, 기술적 레벨에서 성장하여 한계에 이르면, 바로 과학적 레벨로 상승시키는 일이 다 정치가 하는 일이다. 이런 상승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나라는 멈춘다. 멈추면 기운다. 이치가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우리는 기아국가로 출발하여 원조하는 국가로 변신한 정도로 경제발전을 크게 이룬 나라다. 경제발전과 함께 정치발전도 이뤘다. 경제와 정치는 상호 부조하는 관계다. 그래서 정경(政經)이라고 정치와 경제를 서로 붙여서 부르기도 한다. 과거의 경제 급성장도 정치 급성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과거의 정치 형태가 자신의 정치관과 안 맞는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경제 급성장을 이뤘다면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가 급성장하는 요소도 분명히 있다.
여기까지 읽고 과거에도 정치 급성장의 긍정적 요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대목이 나오자마자 화가 나서 읽기를 멈추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은 지적인 두께가 얇거나 좁거나 외눈박이일 가능성이 크다.
김대중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선거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 물론 역사 속에서 ‘체육관 선거’로 불리는 무도한 선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최선의 선택’에 의존하였다. 박정희-김대중, 노태우-김영삼-김대중, 김영삼-김대중-정주영, 이회창-김대중-이인제 등의 대결 구도에서 유권자들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신뢰하는 후보를 선택했던 것이다. 정치는 이래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어느 순간부터 정치에 뭔가 깨달음이 있는 척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선거는 최선을 뽑는 것이 아니라 차선을 뽑는 것이라는 말들이 돌기 시작했다. ‘최선의 선택’이 ‘차선의 선택’으로 추락하였다.
지금은 ‘차선의 선택’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이제 ‘차악의 선택’으로 내몰렸다. 누가 덜 나쁜가를 선택해야 하는 단계까지 추락한 것이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맨얼굴이다.
정치가 추락하고 추락하다가 ‘차악의 선택’을 해야 하는 막장에 이르렀다. 국민은 정치가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막장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각 진영은 자기가 선택한 차악이 나라를 구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 위조된 정의감으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다. 우중(愚衆)으로 전락한 반 이상의 유권자와 기본도 안 되어있는 후보자들이 벌이는 이런 막장 정치 드라마가 지금 우리의 맨얼굴인 것이다. 국민은 차악이라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으로 내몰렸으니, 외통수에 걸린 꼴이다.
지금 우리는 K자 상태에 있다. 우하향(右下向)으로 추락할 것이지 우상향(右上向)으로 도약할 것인지의 경계에 있다는 말이다. 우상향으로 가려면 과거보다 더 나은 정치가 되어야 하는데, 생각과 뜻의 수준이 떨어져 ‘차악의 선택’으로 내몰린 것으로 보았을 때, 우하향으로 갈 가능성이 커졌다.
지금 양대 주력 후보들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분명히 과거보다 더 나아질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당위와 희망을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두 후보가 과거의 대통령들보다 더 낫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이치로 보면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의 경쟁 모습으로 보았을 때, 이재명과 윤석열은 문재인과 박근혜를 넘기 어렵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음의 몇 가지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
“국가관이 잘못되어 있어도 나라를 도약시킬 수 있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국가 경영을 잘 할 수 있다.
과거의 사람들을 다 모아서 쓰고도 나라를 미래로 끌고 갈 수 있다.
논문 표절을 하고도 공정과 정의를 지킬 수 있다.
범죄 경력이 있어도 정직한 통치를 할 수 있다.
친한 사람들이나 편한 사람들하고만 일을 하는 사람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효율적인 통치를 할 수 있다.
친인척에게 쌍욕을 하는 인격을 가졌어도 국가 경영에서 충동적인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인식이 좁아도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다.
평생 좁은 시야에서 일을 한 사람도 국가 통치를 할 때는 넓은 시야를 행사할 수 있다.
범죄 경력이 있어도 국가를 정의롭게 운영할 수 있다.
과학에 대한 인식이 얕아도 국가를 기술을 넘어선 과학의 높이로 끌고 갈 수 있다.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아젠다가 없이도 나라를 도약시킬 수 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가차 없이 내치는 습관을 가지고도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시야가 좁아도 외교를 잘 할 수 있다.”
나라가 우상향으로 도약하기를 꿈꾼다면, 최소한 위에서 인정한 것들과는 다른 각도를 적용하여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배양되어 있지 않다면, 그마저도 힘들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지금의 정치 풍경이 대한민국이 쇠락하는 조짐이 아니기 만을 빌 뿐이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는 대안이 없다고 비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각자 나름대로 뜻을 세우고 생각하여 '우상향'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조건을 따져보고, 그 조건에 맞는 후보를 찾던지, 진영을 벗어나 상대적으로 그 조건에 더 맞는 후보에 눈길을 주고 새로 선택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 이제는 한 단계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