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말새몸짓 뉴스레터 #029] 질문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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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다. 질문하는 자가 가장 높다. 질문하는 자가 앞선 자이다. 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 (사)새말새몸짓 새말새몸짓 뉴스레터 #029 2021.12.20
(*ep.22편의 내용을 발췌합니다. ) "질문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다" 지금 우리는 계속해서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문명은 모두 생각의 결과다. 또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다. 또 문제를 발견해서 해결한 결과다.’그래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 불편함을 발견하는 일, 문제를 발견하는 일과 매우 깊이 관련 되어 있습니다. 불편함이나 문제를 발견해서, 또 어떤 것을 발견해서 그것을 불편함이나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은 질문을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답을 합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 물건까지 포함하고 제도까지 포함하고 심지어 사유의 결과까지 포함해서 문명의 모든 것은 생각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질문의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자는 질문하는 자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실은 대답은 활발한데 질문이 많지 않다는 하는 것으로 매우 유명합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저는 어느 고등학교에 가서 느꼈습니다. 그 고등학생들과 대화할 때는 질문도 매우 활발했어요. 고등학생들을 만나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저는 저렇게 팔팔한 물고기들이 고3을 거치고 수능을 거치고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 속에서 생선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큰 아쉬움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이런 아쉬움을 가질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질문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익숙한 습관이나 방식이나 혹은 제도나 하는 것들이 질문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자, 대답이라는 것을 한번 보겠습니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먹어가지고 누가 요구할 때 다시 뱉어내는 일입니다. 이때 승부는 어떻게 갈리겠어요.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원래 모습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모습은 시제로 하면 “과거일까요? 미래일까요?” 원래 모습은 시제로 하면 미래가 아니라 과거입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다록 훈련된 인재들은 과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런 사람들의 영혼은 과거를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의 거의 모든 논쟁은 다 과거 논쟁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미래 담론이 사라졌다. 과거에 너무 빠져 있다. 우리는 왜 과거에 이렇게 빠져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과거를 한 점의 오점 없이 말끔하게 정리하거나 해결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처럼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혼이 과거 지향적으로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영혼이 과거 지향적으로 훈련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식의 생산자로 사느냐, 지식의 수입자로 사느냐하는 것은 영혼을 미래로 향하게 하느냐, 아니면 과거에 머물게 하느냐 하는 문제까지도 결정해 버리기 때문에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를 정리하지 않고는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 그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닙니다. 과거를 깔끔하게 완벽하게 정리하지 않고도 미래는 열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과거를 정리하지 않고 미래를 열자고 하는 말을 하면, 어떤 사기꾼이나 사이비 같이 보일까요? 그것은 우리 영혼이 미래보다는 과거에 집중하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신문을 한번 펼쳐 보십시오. 우리나라 신문 특히 정치면, 거의 모든 내용이 과거 문제입니다. 경제면을 보면 미래를 걱정하는 면이 훨씬 더 많이 나타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경제는 미래를 향하고 있는데, 정치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런 말과도 같은 말입니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일입니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느냐. 자 원래 모습은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물론 기준이라는 것은 항상 과거입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원래 모습이라는 기준에 맞으면 선, 맞지 않으면 악. 기준에 맞으면 참, 맞지 않으면 악입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항상 옳으냐, 그르냐, 참이냐, 거짓이냐, 선하냐, 악하냐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흔히 빠지는 논쟁이 진위논쟁입니다. 흔히 빠지는 논쟁이 선악 논쟁입니다. 진위논쟁, 선악논쟁이 형편없이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위 논쟁과 선악 논쟁에만 빠져 있다면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이 매우 떨어진다’하는 것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 세계에 새롭게 등장하는 것, 이 세계에 새롭게 발견되는 것, 이 세계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 창의적인 이것들이 옳기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까? 참이기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까? 선하기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까? 악한 것은 등장하지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 등장하는 창의적이고 새로운 것들은 선악, 진위 이전의 문제입니다. 창의적인 활동에, 자유로운 활동에는 선악, 진위가 먼저 개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악, 진위가 먼저 개입하면 창의적 활동은 매우 위축됩니다. 왜 대한민국이 아직 창의성이 활발히 발휘되고 있지 않는가? 왜 문명을 아직까지 선도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 영혼이 미래를 향해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에 머무는 것을 더 진실한 삶의 형태로 생각하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영혼, 자유를 추구하는 영혼, 창의적인 영혼, 독립적인 영혼은 질문을 합니다.질문은 뭡니까? 질문은 내 안에 나에게만 있는 나의 궁금증과 나의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입니다.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세계 어느 누구하고도 공유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하고 나눠같지 않습니다. 이 세계 오직 하나만 있습니다. 자기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질문 할 때만 자기 자신이 됩니다. 대답할 때는 우리 가운데 한명입니다.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우리 가운데 한명이 되기를 꿈꿉니다. 우리가 먼저 있고, 나는 우리보다 나중에 있으면서 우리를 채워주는 한명으로 존재하려고 합니다. 질문은 내 안에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인데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나한테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질문하는 인간은 우리 가운데 한명으로 존재하는 것을 싫어하고 고유한 나, 독립적인 나, 자유로운 나로 존재하기를 꿈꿉니다. 질문하는 나는 이미 정해진 우리 가운데 나, 혹은 우리를 채워주는 내가 아니라 내가 나와 비슷한 나들과의 연합으로 우리를 생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이고, 우리가 다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할 때만 나한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휘된다는 이유로, 독립적 주체, 고유한 주체가 됩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각의 결과다. 불편함을 해결한 결과다. 문제를 해결한 결과다. 결론적으로 질문의 결과다.'라고 말한다면, 질문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다. 질문하는 자가 가장 높다. 질문하는 자가 앞선 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는 일, 높아지는 일, 탁월해지는 일과 독립적 주체가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왜 나를 궁금해 해야 될까요? 우리는 왜 나를 향해서 걸어야 할까요? 우리는 왜 나를 어루만져야 할까요? 나를 믿어야 할까요? 왜 나를 사랑해야 할까요? 그것은 독립적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독립적 주체만 자유로울 수 있고, 창의적일 수 있고, 주체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진석, <생존철학>ep_22 중에서 *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소개합니다. 희망의 근거로서의 '지금 이 시대' 지금 우리가 철학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이유는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보았듯이 서양에 의한 패배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동아시아적인 승리, 동아시아적인 가치를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두고 폭력주의자 혹은 패권주의자로 오해하기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동아시아적인 가치만을 말하는 국수주의자로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나는 우리의 조건과 우리의 토양에 맞는 독립적인 길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큰 틀에서 볼 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는 산업혁명 시기에 형성된 그것이 연정돤 것이다. 산업혁명 시기에 생산 관계가 그 이전과 달라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회 형태를 구성하는데 그때 형성된 사회 구조가 근본적인 변화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1760년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이미 1820년이면 안정적으로 구조화된다. 그리고 좀 더 연장되어 1840년에 끝난다. 그래서 세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1820년 즈음을 대분기大分岐, Great Divergence라고 한다. (중략) 산업혁명으로 생산 구조가 달라지자 사회 구조도 변화됐다. 이 대분기 때 형성된 국제사회의 지배 구조는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물론 일본이 조금 예외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 산업혁명 시기 직후부터 일본의 경제는 이미 독자적으로 매우 좋았다. 외국과의 교류가 경제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았던 에도 시대에도 경제는 매우 발전했다. 이 부분은 좀 더 논의할 필요가 있다. 복잡한 논의는 뒤로 미루고, 우선 최대한 단순화시켜 얘기해보겠다. 아무튼 그때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한 나라는 지금까지 선진국이고, 후진국이었던 나라는 지금까지 후진국(중진국)이다. 왜 그런가? 선진국은 선진국을 유지할 시선의 높이에서 운영되고, 후진국(중진국)은 후진국(중진국)적 시선의 높이에서 운영되기 때문이다. 시선의 높이가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며, 삶의 높이가 바로 사회나 국가의 높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서기가 그렇게 어렵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기존의 시선을 교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대분기 이후에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상승한 예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역전이라는 것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산업혁명 이후의 역사를 근거로 말한다면,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역사란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볼 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의 시선이 그 정도 높이로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다. 물론 우리가 정신을 제대로 차린다는 가정하에서 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만일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사회 경제적 구조가 계속 유지된다면,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울 테지만, 상황이 바뀌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유지되던 사회 구조가 조금 흔들리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로 이동하고 있다. 생산 방식이나 유통방식 등 모든 분야가 전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계급이 달라질 것이고, 그에 따라 정치적 요구도 달라질 것이며, 결국 정치 구조도 변할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지식 정보사회 혹은 디지털 사회로의 이동이다. 이런 변화를 이제야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구조로의 이동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어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희망적인 사실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가 흔들릴 때 우리가 우리만의 주도권을 구성할 수 있는 틈새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틈새를 놓치고 우리가 주도권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또 몇 백 년을 더 종속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경제적으로 더 부강한 나라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좀 더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형성하는 일을 말한다.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 21세기북스, 2018,[2017], 75~79쪽 ** 새말새몸짓 활동을 소개합니다. * 기본학교 2기 2번째 수업이 지난 토요일, 함평 호접몽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수업주제는 <사유하는 삶, 감각적인 삶>이었습니다. * 코로나19의 전국적인 확산세로 인하여 이번수업은 온&오프라인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호접몽가에 참석하신분들은 방역패스확인 및 발열체크 확인후 입실되었고, 온라인으로는 줌을 통해 교감하며 진행되었습니다. * 이번 수업에서 인상깊었던 최진석 교수님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음'을 꿈꾸면, 깊고 넓어진다." (사)새말새몸짓 홈페이지에서는 새말새몸짓의 활동을 소개하고 참여하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만, 늘 새말새몸짓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아울러, 저희는 비영리법인으로 후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새말새몸짓 회원님, 후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원내역은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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