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로그인
  • 참여
  • 자유게시판
  • 참여

    자유게시판

    5월 31일 처칠팩터 북톡 주제들 1 - 제2차 세계대전의 대체역사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윤미정 (110.♡.96.162)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58회   작성일Date 25-04-23 22:55

    본문

    531일 처칠팩터 북톡 주제들 1 - 2차 세계대전의 대체역사 

     

    안녕하세요, 이번 처칠팩터 리더를 맡게 된 윤미정입니다. 이번 처칠팩터는 세 명의 공동 리더가 함께하게 되어, 서로 다른 시각에서 다양한 역사적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저는 특히 영국 현대사, 그중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어 이번 리더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책 읽고 건너가기에 오시는 동지들과, 토론 주제를 미리 공유하고 생각을 나누고 토론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 속에서 노르망디는 흥미로운 상징성을 가진 지역입니다. 영국의 정복왕 윌리엄이 바로 노르망디 출신이고, 그의 무덤은 프랑스에 있죠.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뒹케르크 철수와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이 지역에서 벌어졌습니다. 그 결과 노르망디는 영국 정복왕 윌리엄의 탄생에서부터 현대 유럽의 운명을 바꾼 2차세계대전까지, 저에게 전쟁의 시작과 끝으로(끝일까요?) 다가왔습니다. 지금도 프랑스의 캉(Caen)에 가보면 건물 벽면에 총알 자국과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물리적 기억으로 유럽곳곳에 남아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 대한민국은 아직 종전되지 않은 휴전 상태로 전쟁의 의미가 크게 다가옵니다. “전쟁의 목적은 평화이다돈키호테의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는 핵전쟁 이후의 인류를 침묵의 종족이라 표현합니다. 전쟁의 끝이 과연 인류의 끝이라면,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전쟁은 인류 문명의 주요한 장면을 구성해왔습니다. 처칠과 동지들과 전쟁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역사적 사실에 거스르는 모든 반대 가정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가정은 이렇다. 일부 현대 역사가는 이러한 사고 실험을 거쳐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1940년 영국이 저항을 중단했다면 도저희 바로잡을 수 없는 재앙이 유럽에 불어닥칠 조건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거의 확실한 승리를 거뒀을 것이다. (Chapter 2)

     

    1. 전쟁의 회피 가능성

    1938,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뮌헨 협정을 통해 전쟁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는 체임벌린의 선언은 결국 히틀러의 침략 야욕을 오히려 방조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만일 이때 체코슬로바키아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결정했다면, 독일은 초기 단계에서 견제를 받았을 것이고, 유럽 전체를 휩쓴 전면전이 아닌 지역적 충돌로 국한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선 독일 내부의 상황, 그리고 영국 내부의 정치적 공기 또한 함께 보아야 합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군축을 강요했습니다. 여기에 1920~30년대의 하이퍼인플레이션과 세계 대공황이 겹치며, 독일 사회는 경제적·심리적 절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리어카에 돈을 싣고 가야 할 정도로 화폐가치를 상실했고, 국민들은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태에서 체제에 대한 극단적인 회의와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히틀러는 "질서를 회복하고, 국토를 회복하며,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자"는 명분으로 민중의 절망을 파고들었습니다. 한편, 영국 내 일부 상류층은 공산주의 보다는 히틀러의 파시즘에 동조하거나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유럽 전체의 상류 계층에게 사회주의보다 파시즘이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차악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히틀러는 무질서를 수습하고 사유 재산 질서를 존중하는 자로 비쳤으며, ‘전쟁보다 체제 안정을 우선시했습니다.

     

    이처럼, 전쟁 회피라는 결정은 단순히 겁을 먹은 평화주의자의 나약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경제적 절망에 빠진 독일 대중, 자신의 자산과 질서를 지키려 했던 영국 상류층, 그리고 무엇보다 1차세계대전이 안겨다준 전쟁의 공포가 있었습니다. 나라면 처칠처럼 단호하게 정말 전쟁을 주장할 수 있었을까? 그가 했던 결정은 무모한 선택이었을까, 평화의 전쟁이였을까? 먄악 대한민국 전쟁을 해야 한다면 그 시작 버튼을 정말로 내가 누를 수 있을까? 여전히 전쟁의 시작은 많은 고민을하게 만듭니다.

     

     

    2. 뒹케르크 철수 실패 시

    1940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뒹케르크 철수 작전은 33만 명에 달하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기적적으로 구해낸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수천 척의 군함과 민간 선박이 동원되어 도버 해협을 가로질러 병사들을 철수시킨 이 작전은, 훗날 처칠조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아니나, 탈출에는 성공했다고 말할 만큼, 아슬아슬한 구출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성공의 이면에는 막대한 무기, 장비, 군수물자의 포기가 따랐습니다. 무장 해제된 채 돌아온 병사들, 그리고 유럽 대륙의 빠른 함락은, 결과적으로 영국 본토를 방어하는 데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 당시 처칠이었다면, 병사들의 생명을 우선해 철수를 감행했을까? 아니면 전쟁 수행 능력 유지를 위해 병력 일부를 희생하고라도 더 많은 장비와 거점을 유지하는 쪽을 택했을까? 전쟁을 시작했을 때 무엇을 먼저 고려 해야 할까요?

     

    3. 아우슈비츠를 폭격했더라면?

    1944년 이후, 연합군은 폴란드 남부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미 공군은 수용소를 폭격 가능한 범위에 두고 있었고, 실제로 인근의 공장지대를 폭격한 전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은 전략적 목표가 아니며, 수용자들이 함께 사망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폭격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결정은, 아우슈비츠에서의 가스실 학살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수 있도록 방치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가스실의 정확한 위치와 구조는 명확하지 않았고, 오히려 잘못된 폭격으로 수용자들을 더 많이 희생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고려는,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수용소 폭격이 전쟁의 장기화를 유발할 가능성도 있었던 점입니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집단학살은 단지 몇 명의 광인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관찰한 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충격적인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복잡한 관료 체계, 명령에 순응하는 하급 실무자들, 책임을 분산시키는 시스템 속에서,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라는 말이 수백만의 죽음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전쟁 속 도덕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그 판단이 오늘날 국제 분쟁에도 어떤 잔향을 남기는지를 함께 고민하게 합니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아우슈비츠를 폭격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을까? 전쟁 중 인도적 개입은 언제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도덕적 책임과 군사적 현실이 충돌할 때, 국가 리더는 무엇을 기준 삼아야 할까요? 수십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더 많은 죽음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위험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만약 아우슈비츠가 폭격당해 나치의 학살이 조기에 중단되었다면,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4. 런던 대공습

    런던 대공습은 194097일부터 1941511일까지 약 8개월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독일 공군은 57일 연속으로 런던을 밤마다 폭격했고, 영국 전역의 주요 도시에도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공습으로 인해 약 43천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 13만 명 이상이 부상, 수백만 명이 집을 잃고 지하철역과 방공호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초기에는 항만과 방공 기지를 목표로 했지만, 곧 민간인 지역으로 목표가 전환되면서 전쟁은 더 이상 군인만의 일이 아닌, 시민 모두의 생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결속 이 치명적인 공습은 오히려 영국인의 저항 의지와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칠의 유명한 연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폭격의 공포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겠다는 시민의 의지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한반도는 정전 상태에 놓여 있는 지역이며, 여전히 전쟁의 가능성을 떠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매우 빈번하게 전쟁이 나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를 종종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나는 이 땅에 남아 싸울 수 있을까, 아니면 가족을 함께 떠나야 할까? “전쟁이 나면 피하자는 말은 지혜일까요, 책임 회피일까요? 내가 지켜야 할 '나의 자리'란 과연 어디일까요?

     

    5. 대서양 헌장과 민족자결주의

    1941, 처칠과 루즈벨트는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을 통해 전쟁 이후 세계 질서의 청사진을 발표했습니다. 이 헌장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 존중은 당시 식민지 국가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불러일으킨 상징적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한참 후까지도,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열강은 대부분 식민지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결국 인도, 베트남, 알제리, 케냐 등 많은 식민지에서는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독립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은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전체 국방비는 1940년 기준 GDP의 약 53%에 달할 정도였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은 식민지 자원과 병력, 세수, 금융 지원에 의존했습니다. 인도에서만 약 250만 명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전시 물자와 식량, 석유 등의 조달도 식민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영국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전쟁 중 식민지를 곧바로 독립시킨다는 것은 전쟁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나라면 민족자결주의의 이상을 즉시 실현하고, 식민지를 독립시켰을까요? 아니면 전쟁 수행과 국력 유지를 위해, 독립을 유예했을까요? 식민지를 유지한 결정은 현실적 판단이었을까요, 도덕적 배신이었을까요? 대서양 헌장의 정신이 실제로 구현되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인도-파키스탄 분쟁, 베트남 전쟁, 르완다 학살 등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처칠은 "우리는 대영제국을 해체할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는 히틀러의 제국주의에는 반대했지만, 자신의 제국은 방어해야 할 유산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리더였다면, 정의와 실용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민족자결은 '모든 민족의 것'입니까, 아니면 '영국인만의 것'이었을까요?

     

    저는 이번 토론에서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토론과 찬반투표를 진행해보려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실제 처칠과는 다른 결정을 했을 것 같은 주제들을 골라 구성했습니다. 각 주제는 "내가 그 시기의 처칠이었다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라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토론에서는 먼저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선택지를 살펴보고, 각자의 판단을 공유한 후, 찬반토론에서는 반대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며 결정의 양면성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한 개인의 입장에서, 때로는 한 국가의 리더로서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리더십의 위치, 책임의 무게, 윤리적 갈등을 함께 체험하고 동지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요약

     

    토론 주제 5가지 토론후 익명의 투표후 결과공유

     

    1. 전쟁의 회피 가능성

    2. 뒹케르크 철수 실패 시

    3. 아우슈비츠를 폭격했더라면?

    4. 런던 대공습
    5. 대서양 헌장과 민족자결주의

    7bb4c0b7ed02588c7a8b08659af24acd_1745416964_8357.jpg

    추천1 비추천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