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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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누군가의 바이럴에 못 이겨 책을 구매했다. 보통의 바이럴 글이라면 “이것만 읽으면 당신도 철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안된다고요? 아님 말고~”라는 식일 텐데 내가 본 바이럴 글은 “이 책을 읽으면 생각의 크기를 키울 수 있습니다! 진짜냐고요?! 제 생각의 크기를 보여드릴게요!!”와 같은 식이어서 설득당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럴로 구매한 철학자의 공책 서문에는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쓰여있다.
“글을 기다리는 종이는
온몸을 펴놓은 피부다
글쓰기는 피부가 된 자신을 긁는 일이다. (중략)”
서문 이후 공책의 뒷장에는 저자의 생각을 필사하고 독자의 생각을 더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앞선 글쓰기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인상적이어서 글쓰기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려보려 고민해보았다. 약 2일간의 고민 끝에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글쓰기는 파랑이다!”
(이게 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뒤로 가기를 누르기 전에 조금만 더….)
사실 이 정의는 최근 읽게 된 책의 내용 중 색을 인문학으로 풀이한 방식을 접했기 때문에 내리게 된 것이다. 바이럴 업자와 저자의 의도를 한 줄로 정리하면 “타인의 생각이나 사회적 문제를 필사하고 그것에 내 생각을 덧붙이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색에 관해 풀이한 책의 방식을 빌려 글쓰기를 나만의 언어로 정의해보고 이에 대한 설명을 작성해보려 한다.
파랑, 파랑은 세상 무엇보다 깊어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도 심연의 눈동자를 가지고 나를 바라본다. 파랑을 떠올리면 다음의 것들이 떠오른다. 날카로운 쇠붙이의 칼날, 재즈바에 홀로 앉아 있는 사람, 바다보다 깊은 우울감과 고독,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의 별, 명상에 든 고승들, 완독한 책을 덮은 후의 여운, 애스턴 마틴 뱅퀴시에 앉은 제임스 본드, 젊은 베르테르(*읽어보진 않았음). 글쓰기는 이 모든 것들의 느낌을 품고 있다.
글쓰기는 칼과 같아서 상흔을 남기는데, 칼이 육체에 상흔을 남긴다면 글은 영혼에 상흔을 남긴다. 어떤 글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갈 정도로 베어서 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고, 어떤 글은 다친 영혼을 치료해서 한 인간을 살리기도 한다. 글을 쓰는 시작점에서 우리는 우울한 고독의 동굴로 들어간다. 그러나 글을 쓸수록 우울한 고독의 동굴은 점차 푸른 밤하늘의 종이로 변화한다. 밤하늘 위의 펜은 자유로운 떠돌이별과 같아서 어떤 불빛을 뿜어낼지는 나의 의지에 달려있다. 이 과정을 거쳐 글쓰기를 마치면 베르테르의 삶을 엿본 것과 같이 개운함, 상쾌함과는 정반대의 어떠한 느낌이 남는다. 그것은 도저히 어떤 느낌이라고 설명해낼 수가 없지만, 완독한 후 책을 덮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아마 흰색의 영혼에 파란색의 무엇인가 새겨지는 느낌이 아닐까? 이후 잠시나마 세련된 지성인이 되어 세상을 다 안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한 느낌도 잠시, 글쓰기는 이내 또다시 우리를 우울한 고독의 동굴로 이끈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파랑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파랑이다”라는 주제로 글을 써보았으나 파랑의 느낌과 정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같다. 시와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이나 예술 작품에서 소재로 사용되는 파랑을 예시로 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누군가 파랑을 소재로 사용한 작품을 알고 있다면 공책(空冊)인 댓글 창에 남겨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페이지가 파란빛으로 가득 차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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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아는 게 없는 경만이님의 댓글
아는 게 없는 경만이 아이피 (123.♡.33.101) 작성일 Date
생각해보니까 저는 색깔에 대해 특별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네요. 덕분에 반성합니다ㅜㅜ
파랑색을 소재로 한 작품을 알면 좋겠지만.. 아는 게 없네요ㅜㅜㅜ
음~~ 신호등의 파란불 정도?
페이스북, 삼성 로고 정도?
영화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정도?
"글쓰기는 파랑이다" 라는 글을 보면 프랑스 국기의 파란색 부분만 떠오르네요?
프랑스 국기에서 파랑색이 자유를 의미하잖아요. "글쓰끼는 파랑이다!" 라는 생각은 "글을 쓰는 만큼은 가장 자유롭다!" 또는 "글을 쓸 때 만큼은 자유를 추구한다!"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파랑색은 아니지만, 푸른색과 관련해서 떠오르긴 하거든요. 그런데 푸른색이 좀 애매하긴 하죠? 푸른색이 푸른 하늘, 푸른 숲으로 쓰이는 걸 보면, 파랑색과 초록색이 뒤엉켜 있으니까요. 말을 꺼냈으니 굳이 말하자면
1.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등장하는 마틴 부인
2. 노화순청(爐火純靑)
1.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나오는 마틴 부인이란 인물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아요. 그런데, 푸른 옷을 입고 검정색 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거든요. 이 분은 남편을 뒷바라지하느라 독립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여성인데. 반짝이는 영혼의 그릇을 품고 있어요. 물론 푸른 옷은 상류층이었다는 걸 암시하기 위함이지만, "글쓰기는 파랑이다." 라는 생각을 보고 마틴 부인의 푸른색 옷을 떠올리면, 빛나는 영혼을 품은 자들이 드러내는 색처럼 다가옵니다.
2. 사자성어 중에 노화순청(爐火純靑)이 있거든요. 화로의 불꽃이 푸르게 바뀐다는 의미인데, 단약을 만들 때 청색 불꽃이 나올 때까지 연단을 해야 성공한 것이라는 뜻이에요. 주로 경지에 오른 것을 비유할 때 쓰이는 말이거든요. 어쩌면 "글쓰기는 파랑이다."라는 말은 "경지에 이르기 위한 고독한 과정이다." 같은 생각을 들게 하네요.
"글쓰기는 파랑이다."라는 말은 이상을 쫓는 순수함과 진정성이 느껴져서 너무 좋았습니다.
한상도님의 댓글
한상도 아이피 (183.♡.104.228) 작성일 Date천개의 파랑 ㅡ 천선란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색깔도 문자와 음표 못지않게 추상의 단계가 높군요!
(미술이나 디자인에서) 색깔에 의미를 부여하는 설명이 억지라고 느꼈는데
화가가 사용하는 색깔은 추상의 층위가 높아서 온갖 의미를 품겠네요!
최진석 교수님은 "세상이 문자와 음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셨지만 색깔도 그 곁에 두어야겠어요~
흑백으로 가득하던 제 공책에 노란 불빛이 드네요!
박성진님의 댓글
박성진 아이피 (121.♡.160.219) 작성일 Date극심한 우울함을 표현하는 파랑에서 벗어나고자 애쓰지만, 여전히 그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예술을 표현하는 데 있어 우울함을 넘어선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영감을 얻지 못하는 벽에 부딪혀 있습니다. 이제는 그 우울함 자체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냥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추천합니다. Chet Baker의 "Blue R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