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힘과 크기를 키우고 싶다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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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생각의 힘과 크기를 효율적으로 키우는 나만의 방법에 대해 공유했다. 그것은!! '철학자의 공책(空冊)'을 통해 철학자 최진석의 글을 필사한 다음 나만의 방식으로 더 길게 쓰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 과정을 시간낭비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부지런히 하다보면 나름 생각의 힘과 크기가 커진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언제 발견할 수 있냐고? 가벼운 헛소리에 감동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다!! (* 물론 1년에 2번 있을까 말까다.)
길게 늘려서 쓰려면 평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해 더 깊고 오랫동안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아'라는 두 글자를 더 길~게 늘려서 쓰려면 자아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한 다음 나만의 방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해야 한다. 물론 국어사전에 적힌 의미를 옮겨 적을 수 있다. 하지만 ! 국어사전 스타일이 아닌, 나만의 스타일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생각하는 힘과 크기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것 같지만, 결핍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 가슴 속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 눈에 보이지 않지만 깊고 맑은 호숫가에 다가가면 느낄 수 있는 것. 가까이 다가갈 수록 흐릿해지지만 분명히 있는 것."
뭔 소리인가~ 하겠지만... 그렇다!! 위 글은 '자아'라는 두 글자를 나만의 방식으로 길게 늘려서 쓴 것이다. 이정도로 늘리는 연습을 해야 최진석 교수님의 짧은 글을 A4용지 한 장 분량으로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 이런 부족한 결과물을 보며 누군가는 시간 낭비. 쓸데 없는 짓이라 생각할 수 있다. 존중한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나만의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생각의 영토가 넓어진 것이다!!!! (정신승리)
자아라는 두 글자를 나만의 스타일로 길게 늘려 쓰는 게 쉽지 않듯, 교수님의 짧은 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길게 늘려서 쓰는 것도 쉽지 않다. 나 또한 최근 열심히 훈련을 하지 않았지만!! 최진석 교수님의 짧은 글을 나만의 방식으로 어떻게 길게 늘렸는지 공유해보겠다!.
미리 보기를 통해 볼 수 있는 '철학자의 공책(空冊)'의 문장을 가져올까 했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늘려가길 바라기에, 최진석 교수님의 <나를 공부하는 365+1일>에 있는 12월 5일자 글을 나만의 방식으로 길게 늘려보겠다. (* 일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 맞음.)
12월 5일
참된 자아는 개방적인 사람입니다.
참된 사람은 굳어진 구조 밖으로
벗어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기적이거나 폐쇄적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개방적 자아는
사회를 개방적인 방향으로 진보시킬 수 있습니다.
– 최진석, <나를 공부하는 365+1일>, 궁리출판
참된 자아... 그것은 누군가가 강요하는 확고한 '도덕'이나 '바름'이라는 틀을 뛰어넘을 줄 아는 개방적인 사람이 품고 있는 것이다. 굳어져버린 도덕과 바름은 왜곡된 렌즈로 작용하고 이 렌즈는 세상을 비추는 빛을 굴절시켜 편향된 시각과 사고를 유도한다. 따라서 참된 자아를 품은 개방적인 사람은 왜곡된 렌즈를 벗어던지고 진짜 세계와 진솔하게 대면할 줄 안다. 참된 자아는 도덕과 바름이라는 굳어진 구조를 넘어, 참된 지식과 세상에 닿을 수 있는 개방적인 사람으로 이끄는 힘이다.
때론 개방적인 사람이 고정된 도덕과 바름이라는 구조에서 이탈하면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개방적인 사람은 진짜 세상을 바라보며, 참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진실된 인식과 사고를 한다. 본인 뿐만 아니라 타인과 세계를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나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왜곡 없이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건, 개인적인 것을 공동체적인 것으로 동등하게 연결시키는 걸 넘어 비약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개방적인 사람은 이기적이지 않다.
개방적인 사람은 굳어진 구조를 벗어났을 때에도 왜곡되지 않은 시선과 태도를 유지할 줄 안다. 이는 개인의 경계를 넘어 낯선 타자, 사회와 열린 마음으로 상호작용 할 수 있는 기틀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 이해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는데, 단순 자기 성찰을 넘어 낯선 존재와 세계를 온전히 수용하고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정의할 줄 안다. 그러므로 폐쇄적이지 않다.
만약 참된 사람이 특정 상황을 직면했을 때, 그 상황이 공동체에 의해 개인의 정체성이 속박 당하고 있는 것이라면, 참된 사람은 타자와 그 타자를 둘러싼 세상을 선명하게 마주할 수 있다. 여기서 참된 사람은 타자의 고통을 보며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자아에 결부시킨다. 이는 타자 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통까지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은 개인적인 인식을 공동체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고정된 도덕과 바름이라는 굳어진 구조에서 이탈한 개방적인 사람은 이기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다.
참된 자아는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다. 개방적인 존재는 그 한계를 넘어선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아갈 수 있다. 참된 자아의 개방적인 존재는 호기심을 품고 편견을 무너뜨리고, 타인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익숙하다. 예를 들어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고통마저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동정심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통합시키는 것이다.
누군가는 굳어진 구조 속에서 공동체와 살아가는 걸 이타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몇몇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수 많은 사건들은 특정 방식으로 개인과 사회, 자아와 타자, 소수와 다수라는 이분법이라는 구조 내에서 폭력이 발생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굳어진 구조 속에서 공동체와 살아가는 이들은 소수자를 향한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는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행태를 보인다. 참된 사람이 공동체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은 파시즘적 행위에 저항하는 것이자,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한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다수가 소수에게 가하는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참된 공동체를 위한 움직임이다.
참된 사람은 공동체 내애서 권력의 불균형을 인식하고, 불균형을 초래하는 부당함에 저항한다. 이러한 저항은 단순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게 아닌, 내부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불러 일으키는 왜곡된 렌즈와 맞서 싸우는 것이기도 하다. 참된 사람이 왜곡된 렌즈를 벗어 던지고, 굳어진 구조를 벗어나, 공동체에 씌워진 왜곡된 렌즈를 벗긴다면 사회는 개방적인 방향으로 진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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