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로그인
  • 참여
  • 자유게시판
  • 참여

    자유게시판

    외모 강박이 심한 중손녀와의 대화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102살 경만이 (118.♡.238.33)
    댓글 댓글 1건   조회Hit 85회   작성일Date 24-09-21 18:55

    본문

    내 나이 102살. 이름은 경만(京萬) 큰 도시에서 많은 걸 이루라는 뜻이다. 


    하지만 100년 넘게 살면서 제대로 이룬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괜찮다! 나를 꾸짖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102살이라고 하면 꼬부랑 할아버지를 떠올리겠지만 지팡이 없이 스스로 걸어 다닐 줄 아는 건강한 할아버지다. 


    신체 나이는 82살 정도가 아닐까? 좋아하는 음식은 제육볶음, 롯데리아 양념감자 양파맛이다. 


    지금 내 머리카락은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솜털만 남아 있는데, 왜 피부는 처음 태어났을 때와 다르게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고 휘어져 있을까?? 내 얼굴에 다양한 서사가 담겨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이 내 주름을 만질 때의 손길은 역사의 책장을 넘기듯 조심스럽고 섬세하다. 어쩌면 전립선 문제로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게, 아기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 




    최근 20대 중반의 중손녀와 전화로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 사실 나는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와 손녀, 중손자와 중손녀까지 있기 때문에 모두의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 이름을 모르지만 친근한 중손녀는 고민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연락한다. 이번에 중손녀가 나에게 털어놓은 고민은 외모와 사진이었다. 중손녀는 매번 클럽과 술집을 다니며 여러 남성들에게 헌팅 당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성형외과에 방문한다. 성형외과에서 돌아온 답은 지금의 코는 100점 만점 중 95점에 가깝기 때문에 수술을 해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 중손녀는 여러 성형외과에서 동일한 답을 들었음에도 묵묵히 성형외과를 방문했다. 그녀는 외모에 집착하는 자신의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이를 듣고 조용히 답했다. 


    "의사도 결국 개인사업자다. 장사하는 사람이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제 운동을 하거라."


    "할어버지 무슨 말이죠?


    "매일 거울 속 얼굴만 보고 있으니, 이목구비 중 가장 부족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운동을 통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들여다 보거라. 얼굴이 아닌, 신체 중 어디가 부족하고 더 단련해야 하는지 들여다 볼 수 있겠지."


    "할아버지.. 저 오늘 요거트에 과일 먹은 돼지지만, 유산소랑 필라테스 하고 있어요. 그리고 운동은 할아버지나 하세요.."


    나 102살 경만이. 뜨끔했다. 그래서 빠르게 주제를 전환했다.

    "그러면 일기를 써야 할 때구나. 이제는 일기로 너의 내면을 들여다 봐야 한다. 그렇다면 너의 내면 중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이를 보듬어야 하는지 알 수 있겠지."


    "일기를 쓰다보면, 자기만의 세계에 갇힐 수도 있잖아요?"


    "그때는 책을 읽어야 하는거야. 일기를 쓰다 보면, 매일 같은 단어, 표현을 반복해서 진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로운 표현, 어휘, 단어를 접하기 위해서라도 책이나 신문을 부지런히 읽게 되겠지."


    그녀는 나 102살 경만이의 진부한 답에서 자신만의 길을 발견했는지, 사진으로 주제를 옮겼다. 중손녀는 '분좋카', '분위기 좋은 카페를' 다니며 예쁜 사진을 찍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걸 선호한다. 그런 중손녀는 나와 함께 분좋카에 가기를 권하기도 하지만, 나 102살 경만이는 전시회 같은 정적인 곳을 선호하기에 매번 거절했다. 그러다 102살 할아버지와 가까워지고 싶었는지, 신용산역의 어느 전시회에 친구와 간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저 여기 전시회 갈 생각이에요. 그런데 저는 작품 감상할 생각은 없고, 여기서 예쁜 사진 찍는 게 목적이에요. 저 쫌 이상하죠?"


    "그렇지 않다. 분위기 좋은 카페는 사계절 내내 푸른 소나무라면, 전시회는 일정 기간 동안 피었다 저버리는 꽃이다. 벚꽃 축제도 꽃 구경이 아닌, 벚꽃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지, 꽃을 감상하러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내가 미술관의 어느 곳에 앉아 책자를 읽고 있을 때, 내 옆에 앉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사람들이 10명도 넘는다. 넌 이상한 게 아니라 평범한 것이다."


    "근데 여기는 이상한 조형물들이 많은데,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고민이에요. 저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거든요."


    "그렇다면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지 마라. 조형물이 없는, 작품 설명을 위한 캡션 앞에서 사직을 찍혀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그러면 사람들의 시선은 네가 아닌 작품을 향한다. 만약 너를 보여주고 싶다면 조형물, 작품이 아닌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캡션이나 빈 벽 앞에 서서 사진을 찍어라. 그래야 너에게 시선이 갈 것이다."


    "그게 끝이에요?"


    "팁을 하나 던지자면 전시회장을 한 바퀴 돌고난 다음, 너를 전시하고 싶은 홀로 향해라. 그 홀의 빈벽이나 캡션 앞에서 사진을 찍혀라. 그리고 사진을 찍힐 때는 너라는 작품을 해당 홀에 전시한다는 마음으로 임해라."


    "아이디어가 너무 좋은데요? 할아버지는 사진 잘 찍으실 것 같아요."


    "아니다. 나는 똥손 중에서도 개똥손. 이런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다. 그런데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겨서 돈을 지불하고 싶을 정도의 결과물을 낼 수 있다면 아티스트일 것이고, 그나마 볼만한 결과물을 낸다면 금손, 이도저도 아니면 똥손이지. 나는 똥손 중에서도 개똥손."


    "아니에요! 할아버지 사진 진짜 잘 찍으실 것 같아요."


    "이제 전화는 그만 끊고, 너라는 작품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여라."


    "할아버지 그게 무슨 말이죠?"


    "내일 무슨 옷 입을지 고민하라는 말이다. 전시회장은 대부분 미니멀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어떤 색의 옷을 입어야 너라는 작품이 더 빛날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게요. 무슨 옷 입는 게 좋을까요? 이번에 사놓고 안 입은 민소매 드레스 있는데 그거 입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전시회장에서 사진을 찍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전시회장에서 너를 어떻게 전시하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옷을 선택해라. 그리고 여러 전시회장에서 사진을 찍히며 결과물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네가 어떤 옷을 입어야 너라는 작품이 전시회장에서 아름답게 빛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잠들러 가보겠다. 영원히 잠들겠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거라."



    그렇게 102살 경만이는 잠들지 않고,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게임을 하기 위해 조용히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3abcbc53185e7cf4548ae7fd293c8a3e_1726912256_7464.jpeg
     




    추천2 비추천0

    댓글목록

    profile_image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저는 한 문장도 이만큼 재미있게 쓰기 어려운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쏟아지듯 내놓으시는군요.

    글에 웃음을 마음껏 장치하는 일이,
    작품을 줄기차게 내놓는 일이 제게도 가능할까요.

    제가 경만님만큼 좋아하는 레이 달리오라는 1949년생 할아버지께서
    "사람이 눈 둘, 코 하나, 입 하나인 건 동일하지만
    그럼에도 생김새가 이리저리 제각각이듯
    뇌가 (육체적으로) 얽혀 있는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라고
    후배 세대에 남긴 조언이 떠올랐습니다.
    https://www.principles.com/principles/5c9e00cc-1f29-476b-806a-674b6d1d6512/

    무턱대고 저 자신의 고삐로 삼기에는
    절대적인 초기 조건이 너무나도 결정적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