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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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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한상도 (118.♡.65.47)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819회   작성일Date 24-06-15 11:43

    본문

    민철이네 동네에는 조그마한 안경점이 있다. 이름은 ‘연안'.

    ‘연안’은 안경 뿐 아니라 망원경, 현미경, 만화경 등 눈으로 무언가를 보게 하는 도구는 거의 취급하는 곳이었다.


    민철이는 ‘연안'의 단골이며, 이곳에서 취급하는 도구를 써보는 것에 큰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민철이는 보여지는대로 보게 해주는 도구와 보고 싶은대로 보게 해주는 도구를 다양하게 경험했다.

    가끔 보고 싶은 것이 있을 때는 ‘연안'의 사장님에게 물어보았고, 그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도구를 소개받기도 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떻게 볼 수 있나요?’ 라던지, ‘달 표면에 찍힌 인간의 발자국은 어떻게 볼 수 있나요?’ 등의 질문을 던지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투과전자현미경을 통해 볼 수 있는데, 우리 가게에서는 취급하지 않아' 라던지 ‘아직까지 인간의 발자국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은 나오지 않았어’ 등의 아쉬운 대답을 듣기도 했다.


    특정 사진이나 그림, 만화 등을 볼 수 있게 만들어진 도구들도 재미있었지만, 민철이의 주된 관심사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도구들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에서 이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미술품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순간, 민철이는 궁금해졌다. ‘미술품의 가치는 어떻게 볼 수 있지?’


    ‘연안’의 사장님께 물어보니, 그건 관찰도구로 볼 수 있는게 아니라고 했다.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판단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민철이는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명화라고 불리운 그림들이, 안목이 있다는 몇몇 소수의 인간들이 정해놓은 것일 뿐이란 말인가? 안목있다는 사람이 진짜로 안목 있는지는 어떻게 볼 수 있는거지?


    본다는 것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민철이는 그 짜릿한 경험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미술품의 가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안경, 그것을 민철이는 만들고 싶어졌다.

    민철이는 우선 ‘미술품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민철이는 도서관에 가서 닥치는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화집, 미술사, 미학 등 미술품에 대한 이해를 최대한 넓히고자 했다.


    공부가 점점 쌓이면서, 민철이는 눈이 조금 생긴 듯 싶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민철이는 자기만의 검증 방법을 만들기도 했는데, 인터넷에서 모을 수 있는 그림은 모두 모아 해당 그림이 명화인지 아닌지를 맞춰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안목을 극단적으로 높이기 위해 주변의 안목있는 사람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다. 치열한 지적 토론을 쉬지 않고 지속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안목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민철이는 심한 불안에 떨었다.

    민철이에게는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미술품 가치 판독기'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가치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토대는 분명 존재하나,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미술품의 가치를 대강 알아볼 수 있는 돋보기 정도는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는 현미경은 만들 수 없을 것 같았다.

    민철이는 세계 최고의 ‘미술품 현미경'을 만들고 싶었기에, 도대체 어떤 요소가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을 보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지 알고 싶어졌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머리를 쥐어 뜯어도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이 안되던 어느 날, 민철이는 갓 태어난 조카의 똥기저귀를 갈아주다가 영감이 스쳤다.


    조카의 지독한 똥냄새, 머리통에서 나는 향긋한 분유냄새, 입가에서 질질 흘러내리는 침.

    민철이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했다.

    미술품에서 나는 피냄새와 땀냄새는 창백한 이론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진부한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보기를 좋아하던 민철이는, 여태껏 자신이 보고싶은대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한번 더 놀랐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민철이는 미술평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만이 맡을 수 있는 피냄새와 땀냄새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자 노력했다.

    '연안'에서 취급하는 제품들은 ‘직접 보여주는 도구’였지만, 민철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를 완성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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