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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세 당한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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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박혁거세 (77.♡.246.10)
    댓글 댓글 2건   조회Hit 10,447회   작성일Date 24-02-22 11:32

    본문

    내 욕망에 집중하는 것. 


    최진석 교수님은 내 욕망에 집중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욕망에 집중할 수 없다. 욕망이 완전히 거세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이어트하는 사람은 식욕, 이른 아침에 일어날 사람은 수면욕, 혈기왕성한 사람은 성욕을 억누르느라 힘겨워한다. 하지만 나는 세 욕망도 모두 거세 당했다. 지금은 이 욕망으로부터 힘겹지 않은 매우 초연한 상태다. 누군가는 욕망하지 않는 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처럼 말하던데, 지금 내 상태를 말하고 있는 건가? (당연히 아니겠지.)


    식욕이 사라져 하루에 빼빼로 한 갑과 물로만 배를 채워도 문제가 없다. 수면욕도 사라져 주말부터 지금까지 자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2시간 잤다. 성욕도 깊은 겨울잠에 빠진 것처럼 고요하다. 현재 욕망이 거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동인 꾸준히 챙겨 온 오메가, 루테인, 밀크시슬, 멀티비타민, 아연, 아르기닌 등 10개의 영양제를 습관처럼 입에 털어 넣은 덕일 지도 모른다. 

    욕망이 완전히 거세되니, 내 삶은 가성비가 좋아진 것 같았다. 일단 식욕이 없으니 식비가 덜 들어가서 좋다. 수면욕이 없으니 하루를 더 오래 보내는 것 같아 좋다. 성욕이 없으니 잡념이 줄어들어 좋다. 그런데 모든 욕망을 거세당하니 공허하다. 그리고 그 어떤 효율도 낼 수 없는 동력이 사라진 상태다. 비용이 제로여서 좋지만, 성능도 제로니까 가성비도 결국 제로에 가깝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눈에 이슬이 맺힐 때마다 조용히 닦아내는 것.


    사실 이런 감정과 경험은 처음이다. 그래서 너무 낯설다. 어렸을 때 장난감을 잃어버렸을 때도. 가장 즐겨보던 드라마가 막을 내려 내 곁을 떠났을 때도. 사랑의 가치를 알려준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내 곁을 떠나셨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욕망이 완전히 거세된 상태를 세 글자로 줄이면 우울감이 아닐까. 도대체 이 우울감의 구실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그 무엇은 나에게 우울의 필연성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내 욕망을 모두 거세시켜 버린 걸까?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거세된 욕망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하지만 이건 바람직하지 않다. 내 존재의 책임과 결여를 감추는려고 도망치는 꼴이다. 마치 어둠이 두려워 불을 켜고 자는 서툰 아이처럼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세되어 사라진 욕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려면 욕망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쩌면 지금의 내 상황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감기처럼 누구나 앓다가 해방되는 가벼운 고통일 지도 모른다. 그러니 불만족이라는 오물 속에 빠져있지만, 오물에서 한 껏 더럽혀지는 걸 즐기는 시간을 가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나라는 존재에 불행이란 이름을 붙여, 거세되어 드러나지 못한 욕망을 우울의 구실로 삼는 것만은 피하자. 

    일단 지금의 나는 내 존재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거세된 욕망은 언젠가 다시 자라나겠지. 언젠가는. 자라나겠지. 자라나려면 질문을 해야 한다. 일단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부터 해야, 거세 당한 욕망을 재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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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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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도님의 댓글

    한상도 아이피 (39.♡.28.221) 작성일 Date

    거의 모든 고민들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최진석 교수님의 처방을 믿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발톱이 빠질때까지 걸어보는 것입니다. 아마 수면욕과 식욕은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성욕 또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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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식욕, 성욕, 수면욕이 잦아든 자리를
    새말새몸짓으로 향하는 욕망, 생각하는 욕망, 글짓는 욕망이 차지한 건 아닐까요 :)

    식욕, 성욕, 수면욕이 느껴지지 않아선지
    글 속 박혁거세님의 존재와 생각이 뚜렷하네요

    물어도 물어도 간데없던 내 야망은 어쩌면
    나 이외 모든 것이 흩어진 순간 드러나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