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독하다_서평] 건너가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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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Bacon, Museo Thyssen-Bornemisza in Madrid)
이 책은 반야심경을 다양한 비유와 예시를 들어 설명하고 저자의 생각을 더 해 풀이한 반야심경 해설서이다. 책의 시작은 경전의 역할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경전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는데, 경전 그 자체에 매몰되는 것, 경전을 경전으로만 소비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저자가 평소 “체-덕-지”와 “생활화“를 강조하는 이유를 드러낸다. 이후 책은 반야심경의 자세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반야심경은 붓다의 가르침을 누군가 기록한 경전이고 붓다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그것을 해결하겠다는 소명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인 사성제가 무엇인지, 세상의 고통이 어떤 것이 있는지, 세상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책 전반에 나타나는 반야심경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설명한 예시는 경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자기 부정“에 관한 내용이었다. 저자의 말을 잠깐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건너가기 위해서는 자기 정체성을 부정해야 한다…. 철학을 어떤 특정 내용이 아니라 ”사유의 활동”으로 보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도 마찬가지로 ”반야의 지혜”라는 테두리로 정하고 나면 사람들은 누구나 평가의 잣대로 들이밀기 시작한다. 어떤 개념을 떠받드는 순간, 인식은 그 개념의 틀에 갇히고 만다….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하는 무한 부정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267p)
자기 부정은 우리가 가지는 생각을 어느 한곳에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철학이 동사임을 강조하는 저자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많은 것이 정해진 사회에서 태어난다. 1960년에 한국에서 태어난 남자에게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 당연했을 것이다. 요리는 당연히 여자의 몫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요즘은 어떠한가? 가장 뜨거운 프로그램인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만 봐도 대부분이 남자 요리사들이다. 아주 멋있는 누군가가 사회가 정해놓은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돼”라는 생각을 깨고 “남자도 부엌에 들어가고 싶다!”라는 부정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게 아닐까? 끊임없는 자기 부정만이 우리를 건너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이라고 하면 누군가는 “나쁜, 안좋은(Bad)“라는 뜻만을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나는 부정이란 ”나쁜, 안좋은(Bad) + 다른(Not)“으로 생각한다. 기본학교 면접에 나온 질문으로 서평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마약을 하는 예술가가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예술가는 마약을 해도 되는가?” (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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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한국 요리를 선도하는 흑백요리사들에 의해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돼"라는 생각이 깨졌던 것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겠다!"는 욕망 또는 소명의 결과이지는 않을까요.
별다른 욕망이나 소명 없이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돼"라는 생각을 깬 사람은
부엌에 들어가서 냉장고만 두리번거리다가 물 한잔만 마시고 나올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별다른 욕망이나 소명 없이 부엌에 들어갔다가
엄마가 숨겨 놓은 맛있는 조미료를 발견한 아이가
그날을 계기로 부엌을 몰래 들락날락하며 요리사가 되는 꿈을 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장우영님의 댓글의 댓글
장우영 아이피 (14.♡.171.109) 작성일 Date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돼" = "남자는 요리하면 안돼" 라는 생각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생각이라면,
"남자는 요리하면 안돼"라는 생각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겠다!"라는 욕망과 소명이 튀어 나온 것은 "남자는 요리하면 안돼"의 부정(Not, 다름)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과정에서 창훈님께서는 부정하지 않고도 새로운 소명과 욕망이 발견될 수 있다고 하시는 거겠죠? 저는 부정(Not + Bad)해야 새로운 소명과 욕망이 발견될 수 있다는 거고요.
부정(Not + Bad)해야 새로운 소명과 욕망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근거는 이전에 적은 “인간은 개념화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지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떠올려보세요. 쉽나요. 어렵나요? 저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부정(Not + Bad)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각들을 부정(Not + Bad)하는 과정에서 새로움이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그 새로움 중에서 말씀하신 대로 물 한 잔만 마시고 나오는 사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사람, 무한한 결과가 있을 수 있겠죠.
그래서 책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무한 부정이 나온 것 같아요. 따라서 제가 이해한 책의 내용은 사회가 강요한 대로 생각하기가 쉽고 경전대로 생각하기가 쉽고 정해진 생각을 생각하는 것이 쉽고 나에게서 솟아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어려운 것을 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정해진 것들을 부숴나가라(무한 부정) 였습니다.
다만, 제 생각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그냥 뚱땅 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개념화하지 않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예시와 설명이 있으면 이해가 될 것 같은데 제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설명이 되지 않네요.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7월 24일의 벽돌맨님에 따르면 '그림 그리기'라는 욕망이
"30년 인생 동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서 솟아났다"고 합니다.
https://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wr_id=1908
벽돌맨님께서는 "나는 그림 그리면 안 돼"라고 누군가가 (혹은 스스로가) 부과하던 족쇄를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하셨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를 옭아매고 있던 "나는 그림 그리면 안 돼"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자
(예전부터 세상에 존재하던) "그림 그리기"가 난데없이 솟아난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부수어 보면 "내 업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을 품게도 해 주는 "나는 그림 그리면 안 돼"와 같은 생각이 있는 반면
부수어도 부수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욕망을 품지 않으면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현재를 살아가지 않으면 욕망에 다다를 수 없다"와 같은 생각도 있지 싶습니다.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기본학교 학생은 최진석 교수님을 부수어야 하겠지만
최진석 교수님을 부수면서 만들어지는 알갱이를 내 주머니에 간직하고 다른 알갱이와 조합해 꺼내 쓰면 되지
굳이 최진석 교수님을 이 세상에서 소멸시켜 버려야 할까요!
소명이나 욕망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무한부정 할 수 있겠지만
소명을 발견한 후에는 세상에 대한 무한긍정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린이 흑백요리사는 세상이 본인에게 부과한 도덕을 하나하나 깨뜨리다가 '요리사'라는 꿈을 찾았고
어른이 돼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겠다"는 소명마저 찾은 흑백요리사는 (도덕, 부도덕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내 소명을 실현할 재료로 보일 것 같습니다.
세상을 내 재료로 사용하는 선도자가 되고서부터는 세상이 사람들에게 부과할 도덕마저 내가 정해 버리는지도요.
https://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wr_id=2127
윤미정님의 댓글
윤미정 아이피 (116.♡.169.55) 작성일 Date
새로운 것이 그냥 뚱땅 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개념화하지 않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 예술가들이 있습니다. 사회가 누드는 부도덕하다고 정의했지만 인간의 몸은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발레를 만들었죠. 발레의 옷은 특히 발레리노는 민망할정도로 누드 그 자체 이지만 발레는 누드가 없습니다. 발레는 누드이자 누드가 아닙니다. 이럴때 새말새몸짓이 되는것이지 사회가 누드를 부정한다고 새말새몸짓으로 오늘부터 나는 옷을 벗고 다닐테다 그러면 잡혀갑니다.
거짓말도 마찬가지죠. 사회가 거짓말을 부정하니 나는 거짓말을 하겠다 하면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연극, 소설 문학 작품은 다르죠 연극, 소설은 거짓말 자체 이지만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가 좋아 하는 불륜드라마 너를 닮은 사람은 불륜이지만 불륜이 아닌 사랑으로 느껴지는 ㅎㅎ~ 예술가들은 개념화 없이 이런것들을 바로 직관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예술은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철학같아요.
장우영님의 댓글의 댓글
장우영 아이피 (14.♡.171.109) 작성일 Date
"누드는 부도덕하다" -> "인간의 몸은 아름답다" 이것을 저는 개념화 없이 생각해 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드는 부도덕하다"라는 사회의 정의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는(Bad + Not) "인간의 몸은 아름답다" 라는 새로운 가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말씀하신 내용들의 "나는 옷을 벗고다닐테다", "거짓말을 하겠다" 는 부정(Bad + Not)의 (Bad)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잡혀가거나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는 것이죠.
"누드는 부도덕하다" -> "인간의 몸은 아름답다" 이것과 "누드는 부도덕하다" -> "나는 옷을 벗고다닐테다" 는 둘다 부정, 부도덕입니다.
결국 우리는 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다만 차이는, 미정님께서 보시는 부도덕과 부정(Bad)을 크게 보며 부도덕과 부정을 하지 말자는 것이고 제가 말하는 부도덕과 부정은(Bad + Not)이므로 잡혀가든, 예술을 하든 부도덕과 부정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으므로 제한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정님이 부도덕과 부정이 없이도 새로운 가치가 탄생한다.로 주장하시려면 말씀하신 근거가 아니라 다른 근거로 말씀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말씀하신 예시는 저의 주장의 근거와 동일하거든요. 저는 철학의 발전과정이나, 예술의 발전과정이 이전의 것을 부정, 부도덕하며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사실주의 -> 인상주의 -> 초현실주의의 과정을 한번 숙고해보세요. 인상주의는 사실주의를 부정합니다. 카메라처럼 똑같이 그리는 것을 넘어 자연의 순간을 포착하려고 했죠. 초현실 주의는 또 어떤가요? 우리가 보는 것을 넘어 현실에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고 했죠. 추상 미술은 어떻습니까? 시각적인 것을 넘는 것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죠. 이 과정이 그냥 뚱땅 나온 생각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윤미정님의 댓글
윤미정 아이피 (116.♡.169.55) 작성일 Date아이들의 그림은 추상화가 먼저입니다. 점선면 추상으로 표현하죠. 그리고 아이들은 얼굴은 정면 다리는 옆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다시점을 배우지 않아도 마치 세잔의 그림처럼 시점을 다양하게 그립니다. 아이들의 그림은 사조를 거꾸로갑니다. 사조는 나중에 붙여진것이죠. 예술자체는 개념을 초월해서 은유의 문을 열때가 있습니다.
장우영님의 댓글의 댓글
장우영 아이피 (14.♡.171.109) 작성일 Date
아이들이 점, 선, 면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은 어른들의 시선일 뿐 아이들이 사조를 거꾸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시선이 높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아이들이 사회나 개인의 삶과 질을 향상 시키는 높은 시선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지적으로 숙고된 존재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예술은 황당하죠. 자신들의 욕망이 확고한 상태이니까요. 그렇지만 그 행위 자체가 건너가기는 아닙니다. 지적 숙고가 빠진 자신들의 욕망에만 충실한 상태이니까요. 아이들의 행위가 추상이 되고, 높은 시선을 가진 것이 된다면 우리가 배운 지적 숙고가 필요 없습니다. 아무런 것도 배우지 않은 상태가 되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건너가기를 하기 위해서는 지적 숙고가 필요하다 배웠습니다.지적 숙고가 거쳐진 황당한 욕망이 삶의 질을 증가시키는 것이죠. 따라서 말씀하신 예시는 맞지 않습니다.
예술 자체는 예술의 개념을 초월해서 은유를 열죠.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은유라는 것 행위 자체가 개념화 작업입니다. A의 개념과 B의 개념을 연결한 것이 은유죠. 그래서 A의 개념이 A를 초월해서 다른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A의 개념과 B의 개념이 없이 A가 혼자서 은유를 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간은 개념화하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못한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예시로 “시간은 단발마“라는 문장을 보겠습니다. ”시간“ -> 빠르다 + ”단발마“ -> 빠르다 = ”시간은 단발마“ 라는 은유로 탄생한거죠. ”시간은 빠르다”라는 개념에서 “시간은 단발마”라는 은유로 열게 됐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무엇인지, “단발마”가 무엇인지 개념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의가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도덕이니, 부도덕이니 단어에 집착하다보니 저도 이제는 헷갈리는데요,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는게 어떨까요? 부도덕하고 부정을 생각으로 나타내면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그건 니 생각이고”로 나타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떤 도덕적 가치, 경전, 사회의 생각, 그 외 정해진 모든 것을 대할 때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그건 니 생각이고”를 통해 새로운 행위와 결과가 만들어지고 우리가 건너갈 수 있다고 보면 어떨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그건 니 생각이고” 이후 지적 숙고를 거쳐 행위를 한다면 삶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건너가는 결과과 나을 것이고 지적 숙고 없이 행동한다면 어떤 결과를 나을지 예측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제를 조금 확장해보자면 저는 어떤 결과를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범죄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고 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그건 니 생각이고”를 제한하거나 억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그건 니 생각이고”는 내가 생각하는. 사회가 생각하는, 2024년 10월 6일에 생각하는 생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그건 니 생각이고”는 자유롭게 두고 행위에 대한 결과를 개인이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윤미정님의 댓글의 댓글
윤미정 아이피 (116.♡.169.55) 작성일 Date
예술은 직관적인 영역도 중요한 분야라서 지적으로 숙련되지 않아도 은유의 문을 열수가 있습니다. 어른들도 지적으로 숙련되지 않아도 아이들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가끔 은유의 문을 열곤 합니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은유의 문을 여는것은 로또 같은거라 운이 좋거나 랜덤일때가 있는거고 지적으로 숙련되며 은유의 문을 내가 열고 싶을때 마음대로 열고 싶어서 우리는 지적훈련이 건너가기가 필요한거고구요.
우영님의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질문을 하는것은 내가 답을 정해 놓고 그런 예는 없다 확인하려고 하는것인지? 정말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례가 있는지 알고 싶은건지??
새로운 것이 그냥 뚱땅 하고 나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개념화하지 않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안다는것은 우리가 의식해서 배워서 알때도 있지만 그냥 딱 보면 알때 직관적으로 알때도 있습니다. 그 직관이 뛰어난 종이 아이들이구요. 어른들도 직관이 뛰어 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식은 배워서 알지만 내가 지식을 인지 하는 것은 선험적으로 알아요. 안다는것은 둘다를 통해서 아는것이지 배워서만 알지 않습니다.
나는 가끔 신비하게 느껴지는 어떤 강박에 굴복해 무엇인가를 할 때가 있다. 그때는 알 수 없는 어떤 곳으로 밀려가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으로 불안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관념이 아니라 내 몸속을 돌아다니는 피가 나에게만 속삭여주는 비결을 따르는 것 같아서 오히려 더 편안해지거나 자유를 느끼기도 한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나에게 작지 않은 희열도 주지만, 내가 살아 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러하니 비난 섞인 평가들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더군다나 이런 강박에 밀려 한 행동들은 언제나 나를 크게 성장시켰다. 교수 생활을 17년 정도 했을 때, 나에게만 있던 고유한 ‘비린내’가 맡아지지 않자 바로 학교를 떠났다. 고향 땅 전라도에서 5·18이 원래의 의미를 잃어가자 “나는 5·18을 왜곡한다.”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둘 다 “신비한 강박”에 굴복한 결과다. 나도 잘 모르겠다. 혹시 내 안의 “오버 솔”(over soul)이나 “다이몬”이나 “신”이나 아니면 “진짜 나”가 시킨 것인지도.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이 강박은 나에게 진실의 총화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과 공동체의 행복, 나의 자유와 공동체의 자유, 앎과 실천, 정신과 육체 등 둘로 나뉜 것들로 “우니오 미스티카”(신비한 합일)를 이루는 데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더 집중적으로 발휘될 때, 이런 강박이 찾아와 나를 압도한다. 이렇게 찾아오는 강박을 나는 행운으로 받아들이며, 이런 강박에 차라리 굴복하는 삶을 살려고 애쓴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88671
장우영님의 댓글의 댓글
장우영 아이피 (211.♡.181.17) 작성일 Date
"직관"이 갑자기 왜 튀어나왔나요? 우리는 "창의",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요.
쓰신 글에서 "직관"을 "창의", 새로운 생각"으로 바꿔 읽자면, 교수님의 예시는 맞지 않습니다. 교수님이 신비한 경험을 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지적으로 숙고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술가를 배울 때 무엇이라고 배웠나요? 예술가는 고도로 "정련된" 시선을 가진 자들이라고 배웠습니다. 미정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정련된" 없이도 높은 시선을 가질 수 있다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교수님께서 반복과 차이를 설명하신 것을 기억하시나요? 피카소가 하루 100장의 비둘기 다리만 그렸다고 예시를 들어 설명하신 것을 기억하시나요? 이 말대로라면 피카소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욕망과 그것을 위한 지적 숙고, 반복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적 숙고, 반복을 빼고서 피카소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고 보시나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직관은 창의나 새로운 생각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있는 것을, 아는 것을 넘어 새로운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부정, 부도덕 + 지적숙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답을 정해놓고 그런 예는 없다. 라고 확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말씀하시는 대답들이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아서요.. "새로운 생각" 이나 "창의"는 부정, 부도덕 없이, 지적 숙고 없이 만들어 진다. 라는 것이 주장이라면 그것에 맞는 예시를 설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저의 글이 아닌 저에 대한 억측을 시작하신다면 저도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미정님은 6개월 동안 뭘 배우셨어요?" 그러나 저는 미정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건강한 토론이란 사람간의 싸움이 아니라 A라는 주장과 A'라는 근거, B라는 주장과 B'라는 근거의 간의 싸움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