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아만든 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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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넷플릭스의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에 대한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흑백요리사의 마지막 에피소드가 공개되었습니다.
최종 2인이 겨루었고, 누군가는 승리했습니다.
저는 흑백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을 애청했고, 흠뻑 빠져 감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결말까지 보고난 뒤 느낀 씁쓸한 맛에 대해 적어볼까 합니다.
우선 최종 대결부터 다뤄보고자 합니다.
최종 대결은 ‘나폴리 맛피아’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권성준 요리사와 ‘아이언 셰프 우승자’로 유명한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 셰프가 맞대결을 펼쳤습니다.
권성준 요리사는 양고기와 파스타를 완벽하게 어울리게 한 메인 요리를, 에드워드 리 셰프는 떡을 갈아 고추장 소스를 곁들여 떡볶이를 형상화한 디저트를 선보였습니다.
백종원, 안성재 심사위원 모두 심사를 어려워했지만, 결과는 권성준 요리사의 만장일치 승리였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씁쓸함을 느꼈습니다. 제가 본 권성준과 에드워드 리의 대결은 ‘훈고와 창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승리는 훈고의 편이었습니다.
요리실력이나 음식의 완성도야 두 요리사 모두 탁월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다만 최종 심사에서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에 대한 가산점이 얼마나 있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제 눈에는 ‘기존에 있던 장르의 완벽한 구현’이 ‘없던 장르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이긴 대결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두 심사위원의 한계이자, 대한민국의 한계라고도 보였습니다.
에드워드 리 셰프는 마지막 음식을 만들면서 risk, challenge, limitation 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을 요리로 승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떡볶이를 자기 나름의 해석을 통해 완전히 새롭게 내놓으려고 했습니다.
쌀가루를 뭉쳐놓은 떡을 갈고, 고추장 소스를 곁들여 차갑게 내었습니다. 갈아진 떡이 제한 시간 내에 냉동고 안에서 뭉쳐지지 않을 위험도 감수했습니다.
그리고 요리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황당한 플레이팅이 튀어나왔습니다.
이 떡볶이가 나오기 전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만일 심사위원 중 예술가나 철학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 사람은 에드워드 리 셰프의 손을 들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식의 맛을 떠나, 인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안겨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흑백요리사를 보다보면 대한민국의 ‘훈고적 기풍’이 얼마나 강한지를 더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훈고의 모습은 요리사들이 자신의 별명을 짓는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전 직장이 가진 미슐랭 별 개수를 바탕으로 지은 ‘트리플 스타’와 ‘원투쓰리’, 브랜드 파워를 앞세운 ‘골목식당 1호’와 ‘청와대 셰프’, 자신이 가진 것이 수려한 외모만이 아님을 알리려는 ‘평가절하’와 ‘본업도 잘하는 남자’ 등 보편적 개념을 활용한 별명이 많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명을 하는 참가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훈고적 기풍은 대결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납니다.
참가자들이 하는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미슐랭 꺾어야지’, ‘승부욕 생긴다’, ‘별 따러 가야지’와 같이 상황을 완전한 경쟁구조로 인식하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보였습니다.
또한, 상대의 음식을 더 자세히 관찰하거나 도전의 과정에 가치를 두기보다는 ‘미슐랭 원스타의 실력은 다르다’ 라거나 ‘아이언셰프 우승 경력은 굉장하다’라는 식의 권위에 기대는 발언이 많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겠다’, ‘내가 생각하는 한식이란 이런거다’와 같이 자기 얘기를 시종일관 한 유일한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였습니다.
흑백요리사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댓글목록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제 삶에서 '훈고'라는 개념은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는 없는 개념이었는데,
상도님의 작품을 접하고서 '훈고'라는 개념뿐 아니라 이 세계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려지네요.
저는 최진석 교수님의 기본학교 3기 수업보다
상도님의 [갈아만든 떡]이 '훈고'라는 재료를 더 탁월하게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권성준과 에드워드 리의 대결에 홈 어드밴티지가 작용하지는 않았을까요.
저도 함평 호접몽가 안에서는 위와 같은 평가를 못 했을 겁니다 :)
벽돌맨님의 댓글
벽돌맨 아이피 (211.♡.174.221) 작성일 Date
미술을 예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Fine art와 요리를 예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Fine dining이 같은 "Fine"을 사용한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저 또한 에드워드 리 요리사가 더 수준 높은 "예술가"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무..물코기 외쳤던 유머러스한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