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목과 콜로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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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골목에서 싸우는 일과 콜로세움에서 싸우는 일 중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콜로세움에서 일어날 것이다. 왜 그럴까? 체육대회를 한 번이라도 나가 본 사람이라면 평소의 축구, 농구 시합과 체육대회에서 하는 시합의 느낌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혹은, 대학교 때 발표를 해본 사람이라면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할 때의 느낌과 옆의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내가 하는 행위(축구, 농구, 이야기)는 똑같지만, 세상의 범위가 커져 개인이 요동치고 흔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 흔들림이 세상과 관계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세상과 관계하고 싶지 않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대학교 때의 발표가 끔찍했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마다 세상과 관계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이다. 발표가 편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쓰기가 편한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세상과 관계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세상과 어떻게 관계할지에 대한 질문으로 욕망이 탄생한다. 그리고 욕망하고 행동하는 일이 건너가기다.”라는 내용으로 글을 써보려 한다.
세상과 관계되지 않은, 나 혼자만의 욕망은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어떤 욕망,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관계돼있다. 행복하고 싶다 라는 욕망을 생각해보자. 행복하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한다고 생각 할 수 있다. 돈을 많이 벌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관계된 일일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고 싶다라는 욕망도 세상과 관계되어 있다. 사실 위의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우리는 모두 별이다. 우리 안에 있는 별을 찾아야 한다”라는 철학자의 말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욕망은 세상과 관계된 것이 아닌, 내 안에 있는 어떤 것, 나만의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새말 새 몸짓 게시판을 열심히 읽은 결과 우리의 욕망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관계돼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과 어떻게 관계할지 질문하는 것이 욕망이지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을 욕망으로 설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세상과 관계되는 일 중 삶의 질과 양을 저하하는 일은 어떠한가? 개인의 욕망이 다른 방향으로 생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불법 사이트 운영, 전세 사기, 성범죄가 있을 수 있겠다. 나는 다른 방향이라도 욕망해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 다른 방향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은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 전체 삶의 질과 양을 증대시키는 일, 저하하는 일은 세상과 관계하려는 인간의 본성에 따른 결과이지,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지적 숙고를 거친 사람은 세상과 관계하는 일 중 사회 전체 삶의 질과 양이 내 삶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래서 내 삶의 질과 양을 증대시키고 싶은 사람은 지적 숙고를 거쳐 세상과 관계하는 욕망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 전체 삶의 질과 양을 저하하는 사람이 증대시키는 사람보다 많다면 결국 내 삶의 질과 양이 저하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할 필요 없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삶의 질과 양을 저하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도태되고 결국 인류는 발전하는 방향으로 살아왔다. 앞서 말한 불법 사이트 운영, 전세 사기, 성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테두리 안에서 추방당하고 도태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전체 삶과 질을 저하하는 일을 어떻게 하면 막을지, 세상과 관계하는 일을 어떻게 제한할지 걱정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세상과 관계해야 할지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 행위에 따른 결과로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는 결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위를 할지만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세상을 관계의 범위로 삼아야 하는 것인가? 나의 지인을 세상의 범위로 볼 것인가, 국가를 세상의 범위로 볼 것인가? 그것은 각자 야망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야망의 크기는 지식을 통해 넓어진다. 나는 나의 지인에게 글과 그림을 공유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새말 새 몸짓 게시판에 글을 쓰고 그림을 올린다. 그렇지만 아직 대한민국 전체, 혹은 인류 전체에 내 글과 그림을 보여주겠다. 라는 야망은 갖지 못했다. 그 이유는 지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적 숙고를 거쳐 세상과 관계된 욕망을 가지는 것이 건너가기의 끝일까? 그것은 아니다. 건너가기란 지적 숙고를 거쳐 세상과 관계된 욕망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니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피카소가 붓을 잡지 않았다면? 함평의 철학자가 기본학교를 만들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행동하지 않고서는 삶의 질과 양을 증대시키는 일이든 저하하는 일이든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이 글은 한 줄로 정의할 수 있다. “지적 숙고를 거쳐 세상과 관계하는 욕망을 발견하고 행동하자” 기본학교 6개월 간 배운 내용이 이 한 줄이라고 생각한다. 한 줄짜리 생각을 장황하게 늘려 썼지만 배운 내용에 대해 떠오르는 질문들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항상 글을 쓰기 전 재미있게 써야지. 라고 다짐하지만, 글을 마무리하고 다시 읽어보면 유머라고는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지적 숙고의 과정이 얇으므로 하고 싶은 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유머는 하고 싶은 말을 비틀고 빗대어 표현하는 고도의 지적 활동이다. 다음 글은 유머의 위대함에 대해 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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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학부 1학년님의 댓글
유머 학부 1학년 아이피 (123.♡.33.101) 작성일 Date
사실 저는 이 글을 유머와 연결지어 놓은 게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구약과 신약은 웃음이 악마에게 왔다는 것으로 여겨서 부정적으로 다루고, 엄숙함, 참회 같은 것들을 강조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웃음이라는 것도 부도덕의 영역으로 간주 되었던 것인데. 이걸 이렇게 연결놓으신 걸 보니,, 지적 숙고를 거친 글답네요.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 를 보면, 시지프가 반복되는 돌 굴리기 과정 속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고 하잖아요? 유머가 없는 것 같지만 재미요소가 발견되었습니다.
재미 포인트 1
"글을 쓰기 전 재미있게 써야지. 라고 다짐하지만, 글을 마무리하고 다시 읽어보면 유머라고는 한 줄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일종의 자기 비하적인 유머로 독자에게 재미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어 웃음을 유발함.
재미 포인트 2
체육대회나 대학교 발표라는 일상적인 경험에서 철학적인 개념인 세상과의 관계로 확장시킴. 이는 마치 현실과 상상, 일상과 철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재미를 안겨줌.
그럼 저는 일상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재미를 안겨준 영화 "스페이스 잼: 새로운 시대" 보러 가겠습니다.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거울(?) 속 빛나는 별의 모습이 밤하늘의 진짜 별을 찍은 그 어느 사진보다도
"우리는 모두 별이다. 우리 안에 있는 별을 찾아야 한다"라는 세상의 진실에 더 닿아 있어 보이네요.
분명 정지해 있는 그림인데 반짝반짝 운동하는 듯 느껴집니다.
'추방'이나 '도태'라는 변화도 세상과 어떻게 관계할지 질문하는 누군가의 욕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훈장님이 휘두르는 회초리는 니체가 쓴 글이나 피카소가 잡은 붓처럼 지적 숙고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도구입니다.
구성원이 추방 당하거나 도태되도록 내버려 두는 사회보다
구성원이 추방 당하거나 도태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타이르는 사회가
더 강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