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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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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한상도 (39.♡.28.39)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530회   작성일Date 23-02-12 16:53

    본문

    배를 만드는 일을 하던 목공이 있었다. 이름은 철이.
    10년만에 처음으로 장기휴가를 얻은 철이는 바다낚시를 하러 대양으로 떠났다.
    운명의 장난일까. 열심히 항해하던 철이의 배는 암초를 만나 산산조각 났고, 철이는 배 파편을 끌어안고 살아남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시간은 흐르고,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철이는 작은 섬 해변에 던져져있었다.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풀숲에서 성인남자 5명이 튀어나왔다. 그들도 항해 중 표류하다 무인도에 정착한 것으로 보였다. 다행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고, 원양어선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3개월 전에 무인도에 정착했고,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고 있었다.

    철이는 한동안 그들과 살아야 함을 인지했고,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생활 양식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들은 5인의 무리 중 우두머리를 '형님'이라고 불렀고, 부하들을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라고 불렀다. 그들은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 철이는 그 와중에 그들의 특이한 소통방식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랬다. '형님'이 부하들에게 "가져와라" 라고 말하면, 네 명의 부하들은 눈동자를 부지런히 굴리며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물건을 집어들고 형님에게 갖다주었다. 돌, 막대기, 바나나 그리고 코코넛을 가져오면 '형님'은 막대기를 집어들고 흐뭇하게 '둘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막대기로 다른 부하들을 후려치기도 했다. 그러면 '둘째'의 표정은 밝아지고, 다른 부하들은 '형님'의 표정을 흘깃 흘깃 쳐다보는 것이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형님'이 부하들에게 "잡으러 가자" 라고 말하니, 부하들은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각자가 물건을 가지고 왔다. 돌칼, 활, 낚싯대 그리고 올무를 본 '형님'은 뿌듯한 표정으로 낚싯대를 집었다. 이번에는 '셋째'의 표정이 밝아지고 나머지 부하들은 '형님'의 표정을 살폈다.

    이쯤 되자 살아남아야 하는 '철이'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배를 만드는 일은 굉장히 지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철이는 늘 정확한 용어와 명료한 요구사항에 기반한 소통환경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모호한 요구조건 뿐 아니라 '형님'의 눈치를 봐야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지만, '철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울며 겨자먹기로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형님'에게 수없이 얻어터지고 나서야 철이는 환경에 적응했다. 이제 그들의 일원이 되어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과 일원이 되어 어느 정도 신뢰를 쌓은 철이는 배를 만들어 섬을 탈출하자고 5인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 고된 노동을 아무도 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들은 표류 이전의 삶, 원양어선 노동자로서의 삶이 워낙 힘들었기에 섬에서의 삶에 오히려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인도에 있는 6명 중 가장 지적인 철이는 먹고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탈출을 원했다. 그는 그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자기가 있는 섬이 지리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하려 노력했다. 배가 어디 쯤에서 암초를 만났는지, 표류기간은 얼마였는지, 해가 뜨는 각도는 어느 정도인지를 기반으로 분석한 끝에 철이는 얼추 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이는 또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1달 후에 태풍이 이 섬 근처를 지나갈 것이라는 것이다. 매년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섬이 위치해 있었다. 철이는 서둘러 5인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고, 빨리 배를 만들어 여기를 탈출해야만 한다고 설득했다. 뱃사람이었던 5인은 이 말을 알아듣고, 철이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은 철이에게 명령을 내려달라고 했다.

    본격적으로 배를 만들게 되니, 철이는 5인에게 명령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배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명령을 내리면 5인은 눈치를 보고 자꾸 다른 일을 해오곤 했다. 배를 만들 때 쓸 목재를 구해오라고 하면 나무를 벽돌 크기만하게 잘게 토막내어 가져왔다. 돛을 만들기 위해 있는 가죽을 모아오라고 하면 가죽을 입기 좋게 잘라왔다. 답답한 철이가 화를 내면 다들 눈치만 보기 바빴다.

    철이는 5인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항상 예제를 준비해야 했고, 예제와 똑같이 만들어와달라고 했다. 철이의 일은 두배로 늘었지만, 예제 덕분에 일은 조금씩 진행되었다. 가끔은 철이의 '속뜻'을 읽으려던 '셋째'가 예제와 다르게 일을 해오기도 했는데, 철이가 이에 노발대발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부터는 그런 문제는 사라졌다.

    태풍의 전조가 시작되었다. 배는 아슬아슬하게 완성되었다. 그들은 배를 띄웠다. 철이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항해는 어떻게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항해는 팀워크였다. 5인과 실시간으로 소통해야 하는 환경에 놓였다. 철이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파도는 거셌고, 5인은 침착함을 잃었다. 침착함을 잃으니 그들은 더욱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철이가 '노를 저어!'라고 외치면 '지금이요?' 라고 묻고, '돛을 접어!' 라고 외치면 '누가요?' 라고 물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배는 전혀 속도를 내지 못했고, 원하는 방향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의 배는 태풍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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