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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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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경만이 (123.♡.33.101)
    댓글 댓글 1건   조회Hit 340회   작성일Date 24-11-17 05:01

    본문

    제도와 개념, 도덕이라는 것은 한 번 확립되면 고착화되는 성격이 있다. 모든 것을 자명화하여 질문과 의문을 질식시키는 존재에 가깝다. 이는 현장에서의 감각마저도 마비시켜 보이는 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봐야하는 대로 보게 만들어 생각도 멈춰버리는 노예처럼 되어 버린다. 하지만 모든 역사는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존재와 움직임이 만들어짐의 연속이다. 다시 말해 균열이 생기고 깨지는 것의 반복이다.


    대한민국은 중진국의 함정에 빠져있다. 도덕이라는 틀내에서 사고하느라 구체적인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게 원인이 아닐까.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 제도들은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로 대한민국은 총액벌금형제도를 택하고 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벌금이 가볍고, 저소득층에게는 큰 경제적 타격으로 이어진다. 이는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법의 신뢰성을 저하시킨다. 더 나아가 화폐가치는 해마다 상승하는데, 벌칙조항은 인플레이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범죄 억제 효과도 부족하다. 변화하는 세계를 들여다보지 않는 도덕, 부도덕이라는 프레임으로만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서 그런 게 아닐까?



    억압의 반복은 부도덕해 보이는 윤리가 구원한다


    사람이 태어나고 도덕이 생겨났지, 도덕이 태어나고 사람이 태어났나? 이법위인(以法爲人)이라는 사자성어는 도덕적 판단에 매몰된 사람들을 향한 지적이다. 모든 도덕과 법 그리고 질서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보아도 다르지 않다. 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이름 없는 자, 부도덕으로 간주되는 존재들은 부조리한 움직임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다. 노예 해방, 언론의 자유, 여성 참정권 등 셀 수 없이 많다. 대한민국 또한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세계사회에 편입될 수 없는 이름 없는 존재에서 세계사회에 편입할 수 있는 이름있는 존재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왜 아짂까지 도덕적 판단에 매몰되어 있는가.


    식민지 경험이 있는 다수의 국가들은 평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래서 전쟁을 부도덕, 평화를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구걸하는 듯한 비굴한 평화마저도 도덕으로 간주한다. 표현의 자유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독립 이후 표현의 자유를 통한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현재는 법적으로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종교적 감수성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라는 억압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누군가를 억누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니러니다. 우리도 역사를 통해 억압과 감시의 공포를 배웠는데 왜 이 고통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기존에 정해진 도덕적 판단에 매몰되느라 구체적인 현실을 들여다 보는 윤리적 사고를 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닐까. 


    도덕에 찌들어 있는 자들에게 '부도덕하지만 윤리적인 인간' 이라는 개념은 모호하게 다가온다. 도덕적으로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은 부도덕하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다른 사람을 보호하거나 사회적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면 일부 윤리적 체계에서는 인정 받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도덕과 부도덕만 다뤄지고 윤리적 판단이 덜 다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적으로 수고스럽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판단은 개인의 행동에 대해 도덕적 기준만을 들여다 보는 게 아닌, 윤리적 원칙에 부합하는 판단을 거쳐야 하므로 상당히 수고스럽다. 다시 말해, 변화하는 세계에 맞게 생각의 틀을 전화하고 바꿔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로, 개인주의냐 집단주의냐와 같은 틀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생각과 태도를 바꿀 줄 알아야 한다.  권위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하지만, 때로는 권위에 도전하여 다수의 자유를 쟁취해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에 대한 판타지는 법정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법정 싸움을 증거 싸움이라 한다. 하지만 판타지가 녹아든 법정 드라마를 보자. 이 곳에서는 증거를 바탕으로 한 레토릭 싸움으로 이어진다. 대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드라마의 특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레토릭은 법적인 판단이 증거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한계, 법문의 불명확함, 법 해석에 있어서의 주관과 개입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법정 드라마는 보편 도덕이라는 법을 위반했음에도 언제든지 정의로 뒤바뀔 수 있다는 반전을 통해 법과 도덕의 한계를 고발한다.


    불특정 다수가 보는 자유게시판에 '섹스 섹쓰 쎅스 쎽쓰 쎾쓰 쎾쓲' 라는 글 제목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글의 내용은 보편 다수가 생각하는 성욕을 불러 일으키는 섹스가 아닌 , 마돈나의 SEX BOOK에 대한 순수 감상평이다. 다시 말해, 마돈나의 섹스북 감상 후 따라온 감동을 글 제목에 옮긴 것을 부도덕하고 불온한 것으로 볼 것인가? 개개인의 구체적인 현실을 보지 않고 불법인지 부도덕이냐 단정짓는 것은 억압의 역사를 잊은 것과 다를 게 없으며, 이는 노예의 길을 자처하는 것이다.

    논외로 모든 생각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섹스 섹쓰 쎅스 쎽쓰 쎾쓰 쎾쓲' 라는 글에 "미성년자도 볼 수 있다는 걸 간과했다." 라는 비판이 따라올 여지도 있다. 이러한 비판과 글쓴이의 인성과 가치관을 왜곡하여 공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불온하고 음흉하고 음습한 이야기들이 중점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문학들을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낯설고 새롭고 이질적인 것들을 통해 윤리적 판단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도덕에서 벗어나 부도덕해 보이는 이야기를 통해 그들만의 윤리를 읽을 줄 아는 것이다. 더럽고 냄새나더라도 이를 견디다 보면 우리는 도덕적 인간에서 윤리적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노예에서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렇게 설명하는 지금의 내 모습은 재수없다. 섹스 섹스를 가볍게 외치는 뇌 빈 놈이 마치 깨달음을 얻은 것마냥 행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그나마 재수가 있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부족한 경험에 의하면 일단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인간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CU편의점에서 구매한 '시그니처 페스트리 스위트'란 빵을 먹고 난 다음 양치질 하는 걸 깜박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에 이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다 치과로 향하면 되겠다. 


    생각해보니 올해 스케일링을 안 받았다. 감기도 안 걸리는 젊은이가 누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의료보험 혜택이니 놓치지 말아야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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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진님의 댓글

    박성진 아이피 (121.♡.160.219) 작성일 Date

    최근 인문학을 잃은 대한민국에 대한 번민에 휩싸였던 경험이 생각나는군요. 물론 대한민국 안에는 제가 포함되기에, 저 또한 인문학을 잃었습니다. 그것이 번민의 이유이기도 하지요.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을 삼키며 항상 반성하고자 합니다. 경만이님의 인문학적 성찰에 탄복하고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