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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야 파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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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벽돌맨 (211.♡.181.17)
    댓글 댓글 2건   조회Hit 390회   작성일Date 24-11-1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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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쫓아야 하는 가치가 진--미 가 아닌 미-, 선인 것에 동의한다면, 아름다움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한다. 아름다운 이성, 아름다운 물건,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예술에 관한 것들 말이다. 우리가 쫓아야 하는 아름다움은 어떠한 것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아름다움을 정의 내리는 순간 그것은 추한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차은우를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정의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나는 차은우를 닮기 위해 강남 성형병원을 찾아다닐 것이고 차은우의 몸매를 닮기 위해 열심히 운동할 것이다. 또한 그의 목소리, 표정을 흉내 내려 노력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형수술을 하고 운동을 한다 해도 (슬프지만) 나는 차은우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차은우를 닮고자 했던 노력은 아름다움으로 귀결되지 않고 추한 것으로 귀결될 것이고 결국 나는 차은우와 나의 삶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괴리감으로 허무감만을 느끼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나는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의 정의를 계속해서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베토벤의 음악이든, 장자의 철학이든 말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에서 주인공의 삶은 이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 소설을 뻔한 탐미주의(아름다움만을 쫓으면 결국 허무해진다는) 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소설이 새로운 탐미주의에 관해 다룬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주인공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 후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여성의 환생이라고 느끼는 창녀의 배를 짓밟으며(아이가 유산되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희열을 느낀다. 또한,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름다움의 절대 가치라고 생각했던 금각사라는 사찰을 자기 손으로 불태우며 이제 살아야지.”라고 말한다. 이러한 소설의 내용은 아름다움의 정의를 계속 파괴해 나가야 아름다움을 쫓을 수 있고,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보여준다.

     

    베토벤의 음악과 장자의 철학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공부하는 과정도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가 쫓아야 할 가치는 베토벤의 음악과 장자의 철학을 닮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에 있다. 따라서 아름다움을 어떤 대상으로 정했다면 그것을 파괴하여 아름다움을 쫓기 위한 거름으로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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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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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벽돌맨'이라는 필명이 위압감을 더해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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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눈파는 경팔이님의 댓글

    한 눈파는 경팔이 아이피 (123.♡.33.101) 작성일 Date

    오.... 저도 공감합니다... 그것보다 차은우를 닮기 위한 미시마 유키오의 몸매가 참 예쁘네요. 운동을 얼마나 해야 저런 선이 나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