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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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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히틀러 1일차 (223.♡.249.178)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213회   작성일Date 23-07-24 04:24

    본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누군가는 내 감정과 생각을 언어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것이므로 침묵하겠다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런데 난 이건 잘못 해석한거라 생각한다. 물론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죽마고우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그는 세상 사람들이 벙어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본 뜻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침묵하고 있으라는 게 아닐까.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사실에 대해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받아들이는 걸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가 살고 있던 세상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살던 세상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할 줄 알았다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지 못했을까?
    확인되지 않은 동네 가십거리를 전파하기 바쁜 마당발 아주머니였을까?
    알맹이 없는 무용담만 늘어놓기 바쁜 주정뱅이 아저씨였을까?
    말하는 능력이 덜 훈련되어 두서없이 조잘거리는 꼬맹이들이었을까?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학교를 다녔지만 성적 미달로 쫓겨난 아돌프 히틀러였을까?

    히틀러의 연설에는 힘이 느껴진다. 어쩌면 무대 위의 테너처럼 압도적인 성량을 갖춘 덕분일 지도 모른다. 연설에서 힘이 느꺄진 이유를 메시지가 아닌 성량이라 한 이유는 서점에 진열된 히틀러 관련 서적에서 볼 수 있다. 히틀러 관련 책을 들여다 보면, 히틀러의 반대편에 서있었던 러시아의 혁명가인 블라디미르 레닌을 시작으로 니콜라이 부하린, 레프 트로츠키 등의 인물들처럼 지적인 엄숙함을 요구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성량이 좋아 강한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능했지만, 진짜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지식이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히틀러의 메시지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논하는 게 두려워 모든 책들이 침묵하는 것이다.
    나는 전자라고 생각한다.

    왜 지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히틀러의 말에 힘이 있었을까? 성악가를 연상케 하는 훌륭한 목청도 있었지만, 그의 말은 단조롭고 반복적이며 다소 과장되었다. 이는 마치 유튜브의 쇼츠, 인스타그램의 릴스와 같은 짧고 강렬한 콘텐츠로 비유할 수 있겠다. 그래서 대중들을 사로잡기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히틀러의 말에는 지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중을 끌어당길 수 있었을까? 난 은유의 힘이라 생각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은 히틀러에게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유명하다. 그렇다 보니 히틀러의 산문에서도 전쟁론에 나온 표현인 ‘전장의 안개’, ‘정책의 연속인 전쟁’ 등의 표현들을 은유적으로 인용한 걸 볼 수 있다.

    “국민의 평화로운 경제력으로 다른 국민을 정복할 수 없다고 믿거나, 경제적으로 약한 국민이 스스로 먹고살 힘이 없어져서 경제적으로 더 강한 국민에게 죽임 당하는 걸 원치 않는다면, 평화적인 경제적 안개가 찢기고 전쟁이란 정책의 연속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평화적인 경제적 안개가 찢기고’, ‘전쟁이란 정책의 연속’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연상시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은유인지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로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 이런 글들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 에서도 종종 볼 수 있가.) 다만, 대중들을 자극하고 새로운 바람을 이끌게 만드는 키워드인 <경제력>, <강한 국민과 약한 국민> 그리고 <전쟁>을 활용한 덕분에 환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 세 가지 키워드는 당시 독일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던 베르사유 조약을 은연 중에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고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음에도 환호가 쏟아졌다. 그 결과 비트겐슈타인이 살던 사회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지 못하는 풍경이 그려진 게 아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열심히 말하던 히틀러는 진짜 말을 해야 할 순간에 조용히 자살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고 했다. 난 그가 왜 이 말을 뱉었는지, 그리고 히틀러를 보고 한 말인지는 모른다. 이를 추적하여 연구하거나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주위 히틀러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한 말은 아니었을까. 우리 대한민국에도 히틀러 같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머물러 있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최진석 교수님께서는 종종 과학의 가치를 논하셨다. 과학은 객관적 사실에 가까워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과학이 제2의 종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경계하기도 한다.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유명 광고 문구는 긴 경험과 테스트를 바탕으로 침대를 만들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이처럼 과학은 우리 사회에서 믿음과 체계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보니 ‘과학적’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수긍하게 돼버리는 현실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이게 과학을 경계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지다.
    과거는 종교를 벗어나 과학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미래는 과학을 벗어나 어디로 갈까? 최진석 교수님의 말씀처럼 초과학이라는 곳을 향해 나아갈까? 아니면 초과학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나아갈까?

    생각해보니 나는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지도 공부하지도 않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침묵하지 않고 이렇게 떠들어버렸다.

    오늘은 히틀러 1일차다.
    하지망!!!!!! 내일은 비트겐슈타인 1일차로 살 것이다!!!
    ^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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