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 그리고 이름 없는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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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최진석 교수님과의 마지막 수업이었습니다. 새말새몸짓에 후원해 주신 동신대학교 이주희 총장님께서 매우 특별한 공간을 허락해 주신 덕분에 멋진 곳에서 마지막 수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이장우 가옥이었는데요. 평소 경험하기 힘든 멋진 공간에서 빵과 음료까지 (공짜로) 자유롭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아 ~~ 다시 떠올리니까 배부르다!! ^~^
최진석 교수님께서는 평소와 달리 저에게 여러 질문을 하셨습니다. 가장 부족한 학생이 저였기에 제가 제대로 이해하면, 모든 학생이 다 이해한 것이므로 확인차 질문하신 것 같아요. 갑자기 들어온 질문은 제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어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 사실 원래 백지였음.) 마지막 수업에 그려진 제 모습이 부끄럽고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멍청한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보완해야 할 면들을 선명하게 확인했으니까요.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한 시간과 새말새몸짓에 후원해 주신 분들 그리고 동신대학교 이주희 총장님께서 보내주신 성의는 대한민국 2030 청년 세대가 앓고 있는 질병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질병에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이름 없는 질병’입니다. 이유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거든요. 다른 지식인이 이미 이름을 붙였거나 정의 내릴 수 있겠지만, 저는 몰라서요. 이 질병은 희망을 잃어버린 일본 청년들과 증상이 비슷하디만 동일하게 보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질병’의 증상은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2030 세대의 아니꼬운 모습이라 할 수 있는 무기력함, 우울, 비관 등에 가깝습니다. ‘이름 없는 질병’이라 한 이유는 우울, 비관, 무기력함이란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바다 건너온 개념인 멜랑콜리(melancholy)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질병’은 여러 개념과 단어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저의 어휘력과 지식이 부족한 탓이겠죠.
기성세대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약소국의 서러움과 한으로 점철되어 있던 대한민국에 자긍심과 자부심을 덧씌워 아름답게 빛냈으니까요. 그들은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통해 약소국의 서러움을 전해 들었고 배고픔을 경험했기에 약소국의 한과 서러움을 그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라 할 수 있는 2030 세대, MZ세대는 다릅니다. 약소국의 서러움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다가와 크게 와닿지 않고 배고픔 보다 배부름이 일상이니까요. 생각해 보면 2030 세대가 직접 보고 느낀 대한민국은 자긍심과 자부심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민주화 바람을 시작으로 88 올림픽을 통해 세계에 우뚝 서 있는 모습,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모습, 2002 월드컵 4강 신화, K-문화가 세계 곳곳에 스며드는 게 대표적이겠죠. ‘헬조선’이란 말이 자취를 감추고 2020년 즈음에는 ‘미국이 깜짝 놀라고 일본이 경악하고 중국이 부러워한 대한민국’과 같은 인터넷 유행어가 돌면서 모든 것에 ‘K-‘ 를 붙이기도 했죠.
2030 세대, MZ세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는 ‘당당함’이 아닐까 합니다. 누군가는 “싹수가 노랗다”, “눈치가 없다.”라고 하는데요. 어쩌면 이는 기성세대의 한과 기성세대가 끌어올린 대한민국의 위상이 뒤엉켜 형성된 산물로 보입니다.
기성세대에게 부모란 존재는 권위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반항이 아닌 대의명분에 따라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부모님 세대가 품은 약소국의 한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희생은 당연시되었겠죠. 그래서 기성세대에게 한이 있다면, 부모님이 품었던 약소국의 한이 아닌 나답게 살지 못했다는 한이 아닐까 합니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헌신과 희생, 대의명분으로 끌어올린 대한민국의 위상을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의 자아는 대한민국 위상처럼 크게 팽창하였습니다. 여기에 기성세대가 품고 있던 나답지 못한 한이 섞이면서 지금의 2030, MZ세대의 당돌함이 형성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과거 90년대 서울 부유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오렌지족의 확장판이라 볼 수 있겠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2030 세대가 어렸을 때 바라본 대한민국은 생기와 활력이 넘쳤지만,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은 부모님보다 훌륭한 스펙을 가졌음에도 생기를 잃어버린 푸석푸석한 존재에 가깝거든요. 어린 시절 찬란한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자아가 팽창되었지만 실제 나 자신은 초라해 보이는 괴리, 열심히 노력해도 어린 시절 봐왔던 대한민국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없다는 좌절감 또는 한이 ‘이름 없는 질병’을 부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MZ세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플렉스(FLEX) 문화인 명품, 오마카세, 골프 등을 소비하는 걸 누군가는 허세라 비판하죠. 하지만 저는 허세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바라보며 부풀려진 자아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풀려진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자기 분열적 행위인 자해와 비슷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해를 관종이라 하지 않듯, MZ세대의 플렉스를 허세라 하고 싶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와 유사한 풍경은 대한민국 청년뿐만 아니라 탈북민이나 실직한 가장을 통해서도 종종 드러납니다. 탈북하면 우리나라 드라마에 그려진 재벌이나 중국, 러시아에서 만난 여유로운 한국인처럼 살 수 있을 거란 환상을 품었으나 현실은 다르니까요. 이른 나이에 실직하게 된 가장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을 책임지던 가장의 팽팽한 정체성은 재취업에 실패할 때마다 점점 시들시들해지거든요.
어쩌면 ‘이름 없는 질병’은 현실이라 믿었던 환상이 깨졌을 때, 팽팽한 자아와 시든 내 모습 간 괴리로 발생한 충격, 세대를 거쳐 대물림된 한 등의 개념들이 뒤엉킨 것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세대마다 한의 성격만 바뀌었을 뿐 계속 대물림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설움괘 한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이름 없는 질병’은 청년세대를 넘어 청년 이후 세대까지 이어져 대한민국을 병들게 할 거란 망상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름 없는 질병’을 의지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지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는 모호한 희망을 바라보며 변화하겠다는 막연한 다짐과 다를 게 없으니까요. 맹목적 자기 암시에 불과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름 없는 질병’의 근본적인 속성이라 할 수 있는 한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 순간 우리 삶은 희로애락뿐만 아니라 무의식이 머무를 자리가 없어져, 기계적인 삶으로 전락되겠죠.
‘이름 없는 질병’은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무당, 돌팔이 같은 저의 과한 해석일 수 있으니까요. 최근 우울증 진단이 느슨해지는 바람에 우울증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바라본 저의 생각은 2030 세대의 비관적인 나약함을 ‘이름 없는 질병’으로 변호하려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멀쩡한 청년들을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로 만드는 것이기에 위험한 생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회식으로 유대감을 느끼고 야근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2030, MZ세대가 아닌 것이냐며 세대론 자체에 반문할 수 있겠죠.
동신대학교 이주희 총장님께서 새말새몸짓 기본학교에 보내주신 성의는 최진석 교수님을 향한 지지도 있으셨겠지만 제가 바라본 ‘이름 없는 질병’을 포착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2030 세대가 앓고 있는 ‘이름 없는 질병’을 꾀병으로 바라보지 않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신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이는 제가 새말새몸짓에 후원해 주신 분들을 향하여, 감사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진석 교수님 또한 청년들이 앓고 있는 ‘이름 없는 질병’을 목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한 시간은 ‘이름 없는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처럼 다가왔거든요. 고독과 몰입을 통하여 자의식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해석하는 과제는 느림을 기반으로 하여 심오함과 숙고된 나만의 신의를 형성하고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리고 ’ 이름 없는 질병’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다스리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의 힘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끊임없이 불어넣으려 노력하셨습니다.
제가 이주희 총장님을 비롯한 새말새몸짓에 후원해 주신 분들을 향한 감사함에 보답할 방법은 ‘이름 없는 질병’에 쓰러지지 않는 것, 기성세대가 극복하려 한 약소국의 서러움과 배고픔이 우리 세대에 다시 재현되지 않도록 막는 것 그리고 ‘이름 없는 질병’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이 다음 세대에 더 이상 대물림되지 않도록 끊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존경받아 마땅한 기성세대 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우습게 바라볼 정도가 되어야겠죠.
그렇게 된다면, 우리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그려놓았던 찬란한 풍경을 감상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멋진 풍경을 그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상에 뛰어들거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린 세상, 우리가 보여준 세상, 우리가 닿은 세상이 어린 시절 바라본 대한민국 보다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름 없는 질병’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수업은 마지막이었지만 새말새몸짓에 후원해주신 분들과 이주희 동신대학교 총장님을 향한 감사한 마음은 돌림노래처럼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수업이라 좀 공허한데요. 이 공허함을 제육볶음으로 채워야겠습니다 ㅋㅋㅋ 제육보금 너는 뒤졌다 ㅋㅋㅋㅋㅋㅋㅋ 기다려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최진석 교수님께서는 평소와 달리 저에게 여러 질문을 하셨습니다. 가장 부족한 학생이 저였기에 제가 제대로 이해하면, 모든 학생이 다 이해한 것이므로 확인차 질문하신 것 같아요. 갑자기 들어온 질문은 제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어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 사실 원래 백지였음.) 마지막 수업에 그려진 제 모습이 부끄럽고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멍청한 모습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보완해야 할 면들을 선명하게 확인했으니까요.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한 시간과 새말새몸짓에 후원해 주신 분들 그리고 동신대학교 이주희 총장님께서 보내주신 성의는 대한민국 2030 청년 세대가 앓고 있는 질병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질병에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이름 없는 질병’입니다. 이유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거든요. 다른 지식인이 이미 이름을 붙였거나 정의 내릴 수 있겠지만, 저는 몰라서요. 이 질병은 희망을 잃어버린 일본 청년들과 증상이 비슷하디만 동일하게 보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질병’의 증상은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2030 세대의 아니꼬운 모습이라 할 수 있는 무기력함, 우울, 비관 등에 가깝습니다. ‘이름 없는 질병’이라 한 이유는 우울, 비관, 무기력함이란 단어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바다 건너온 개념인 멜랑콜리(melancholy)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질병’은 여러 개념과 단어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저의 어휘력과 지식이 부족한 탓이겠죠.
기성세대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약소국의 서러움과 한으로 점철되어 있던 대한민국에 자긍심과 자부심을 덧씌워 아름답게 빛냈으니까요. 그들은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통해 약소국의 서러움을 전해 들었고 배고픔을 경험했기에 약소국의 한과 서러움을 그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라 할 수 있는 2030 세대, MZ세대는 다릅니다. 약소국의 서러움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다가와 크게 와닿지 않고 배고픔 보다 배부름이 일상이니까요. 생각해 보면 2030 세대가 직접 보고 느낀 대한민국은 자긍심과 자부심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민주화 바람을 시작으로 88 올림픽을 통해 세계에 우뚝 서 있는 모습,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모습, 2002 월드컵 4강 신화, K-문화가 세계 곳곳에 스며드는 게 대표적이겠죠. ‘헬조선’이란 말이 자취를 감추고 2020년 즈음에는 ‘미국이 깜짝 놀라고 일본이 경악하고 중국이 부러워한 대한민국’과 같은 인터넷 유행어가 돌면서 모든 것에 ‘K-‘ 를 붙이기도 했죠.
2030 세대, MZ세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는 ‘당당함’이 아닐까 합니다. 누군가는 “싹수가 노랗다”, “눈치가 없다.”라고 하는데요. 어쩌면 이는 기성세대의 한과 기성세대가 끌어올린 대한민국의 위상이 뒤엉켜 형성된 산물로 보입니다.
기성세대에게 부모란 존재는 권위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반항이 아닌 대의명분에 따라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부모님 세대가 품은 약소국의 한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희생은 당연시되었겠죠. 그래서 기성세대에게 한이 있다면, 부모님이 품었던 약소국의 한이 아닌 나답게 살지 못했다는 한이 아닐까 합니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헌신과 희생, 대의명분으로 끌어올린 대한민국의 위상을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의 자아는 대한민국 위상처럼 크게 팽창하였습니다. 여기에 기성세대가 품고 있던 나답지 못한 한이 섞이면서 지금의 2030, MZ세대의 당돌함이 형성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과거 90년대 서울 부유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오렌지족의 확장판이라 볼 수 있겠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2030 세대가 어렸을 때 바라본 대한민국은 생기와 활력이 넘쳤지만,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은 부모님보다 훌륭한 스펙을 가졌음에도 생기를 잃어버린 푸석푸석한 존재에 가깝거든요. 어린 시절 찬란한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자아가 팽창되었지만 실제 나 자신은 초라해 보이는 괴리, 열심히 노력해도 어린 시절 봐왔던 대한민국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없다는 좌절감 또는 한이 ‘이름 없는 질병’을 부른 것이라 생각합니다. MZ세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플렉스(FLEX) 문화인 명품, 오마카세, 골프 등을 소비하는 걸 누군가는 허세라 비판하죠. 하지만 저는 허세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바라보며 부풀려진 자아에 압도당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풀려진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자기 분열적 행위인 자해와 비슷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해를 관종이라 하지 않듯, MZ세대의 플렉스를 허세라 하고 싶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와 유사한 풍경은 대한민국 청년뿐만 아니라 탈북민이나 실직한 가장을 통해서도 종종 드러납니다. 탈북하면 우리나라 드라마에 그려진 재벌이나 중국, 러시아에서 만난 여유로운 한국인처럼 살 수 있을 거란 환상을 품었으나 현실은 다르니까요. 이른 나이에 실직하게 된 가장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정을 책임지던 가장의 팽팽한 정체성은 재취업에 실패할 때마다 점점 시들시들해지거든요.
어쩌면 ‘이름 없는 질병’은 현실이라 믿었던 환상이 깨졌을 때, 팽팽한 자아와 시든 내 모습 간 괴리로 발생한 충격, 세대를 거쳐 대물림된 한 등의 개념들이 뒤엉킨 것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세대마다 한의 성격만 바뀌었을 뿐 계속 대물림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설움괘 한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이름 없는 질병’은 청년세대를 넘어 청년 이후 세대까지 이어져 대한민국을 병들게 할 거란 망상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름 없는 질병’을 의지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지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는 모호한 희망을 바라보며 변화하겠다는 막연한 다짐과 다를 게 없으니까요. 맹목적 자기 암시에 불과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름 없는 질병’의 근본적인 속성이라 할 수 있는 한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 순간 우리 삶은 희로애락뿐만 아니라 무의식이 머무를 자리가 없어져, 기계적인 삶으로 전락되겠죠.
‘이름 없는 질병’은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무당, 돌팔이 같은 저의 과한 해석일 수 있으니까요. 최근 우울증 진단이 느슨해지는 바람에 우울증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바라본 저의 생각은 2030 세대의 비관적인 나약함을 ‘이름 없는 질병’으로 변호하려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멀쩡한 청년들을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로 만드는 것이기에 위험한 생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회식으로 유대감을 느끼고 야근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다면 2030, MZ세대가 아닌 것이냐며 세대론 자체에 반문할 수 있겠죠.
동신대학교 이주희 총장님께서 새말새몸짓 기본학교에 보내주신 성의는 최진석 교수님을 향한 지지도 있으셨겠지만 제가 바라본 ‘이름 없는 질병’을 포착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2030 세대가 앓고 있는 ‘이름 없는 질병’을 꾀병으로 바라보지 않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신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이는 제가 새말새몸짓에 후원해 주신 분들을 향하여, 감사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진석 교수님 또한 청년들이 앓고 있는 ‘이름 없는 질병’을 목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한 시간은 ‘이름 없는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처럼 다가왔거든요. 고독과 몰입을 통하여 자의식을 냉철하게 바라보며 해석하는 과제는 느림을 기반으로 하여 심오함과 숙고된 나만의 신의를 형성하고 지킬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리고 ’ 이름 없는 질병’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다스리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의 힘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끊임없이 불어넣으려 노력하셨습니다.
제가 이주희 총장님을 비롯한 새말새몸짓에 후원해 주신 분들을 향한 감사함에 보답할 방법은 ‘이름 없는 질병’에 쓰러지지 않는 것, 기성세대가 극복하려 한 약소국의 서러움과 배고픔이 우리 세대에 다시 재현되지 않도록 막는 것 그리고 ‘이름 없는 질병’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이 다음 세대에 더 이상 대물림되지 않도록 끊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존경받아 마땅한 기성세대 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우습게 바라볼 정도가 되어야겠죠.
그렇게 된다면, 우리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그려놓았던 찬란한 풍경을 감상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멋진 풍경을 그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세상에 뛰어들거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린 세상, 우리가 보여준 세상, 우리가 닿은 세상이 어린 시절 바라본 대한민국 보다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름 없는 질병’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합니다.
수업은 마지막이었지만 새말새몸짓에 후원해주신 분들과 이주희 동신대학교 총장님을 향한 감사한 마음은 돌림노래처럼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수업이라 좀 공허한데요. 이 공허함을 제육볶음으로 채워야겠습니다 ㅋㅋㅋ 제육보금 너는 뒤졌다 ㅋㅋㅋㅋㅋㅋㅋ 기다려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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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경님의 댓글
조윤경 아이피 (119.♡.181.25) 작성일 Date그간 수업 후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하고 또 아쉽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