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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위상(칠곡의 존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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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민석 (203.♡.249.66)
    댓글 댓글 14건   조회Hit 228,826회   작성일Date 24-01-20 12:26

    본문

    칠곡 할머니들은 글자는 알지 못하지만 의사소통은 가능했음이 틀림없다. 흔히 '까막눈'이라고 불리운다. 나는 이들이 모국어에 대한 2차적 이해가 부족한 것임을 먼저 주장하고 싶다.
    2차적이라는 의미는  1차적•근본적 이해 단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적어도 이 지면을 '이해'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들은 2차적인 언어이해에 도달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1차적 이해를 거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읽고 쓸 수 있지만, 말하고 듣을 수 있는 능력은 결여되는 그런 반대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이것이 시대적 특수성으로써 등장한 새로운 인간이라고 본다. 이에 따라 적절한 명사도 필요하다고 본다.
     과거에는, 읽고 씀이 하나의 힘이었다. 그들은 분명 지식인이었고 소수였다. 절대적 다수는 '까막눈'이었다. 칠곡 할머니들은 읽고 씀이 당연한 시대에서 그 당연함은 다시금 당연한 것이 아닌 것임을 그리고 불가능한 것임을 증명하는 자들이다.
    1차적 언어이해에 대해서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라는 제한적 지리적•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읽고 씀과 말하고 듣기가 분리되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충분히 질문할 수 있는 것이 되었음을 확신한다. 그것이 '모국어'의 위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어째서 반쪽 자리만이 가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최초로) 절대로 언어를 읽고 쓰기위해 배우지 않았다. 차라리 까막눈의 과정이 선행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럼 의사소통을 위해서 였을까? 인간은 '할머니'의 명칭에 부합하기위해서 즉, 세월의 풍파를 견디고 견뎌 곪아 문드러진 그런 육체를 지니기 위해서는 타인의 도움없이는 살아나갈 수 없다.  여기서 의사소통은 타인과의 관계맺음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생물학적 장애는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기에 의사소통이 읽고 씀에 앞서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까지는 말하고 듣고 읽고 씀을 1차,2차로 구분하여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서 언어의 존재론적 기능에 대해서 다루고 싶지만, 이만 줄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개인적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나는 언어를 읽고 쓰기위해서 교육을 받았을 때, '밥'이라는 기표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초성과 종성이 어떻게 중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쓸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이질적이고 낯설음이 앞서 있었다.
    "밥이 왜 '밥'이에요?" "어떻게 밥이 '밥'이 될 수가 있어요?"라고 나에게 언어를 가르쳐준 자들에게 묻고 다녔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밥이 '밥'이지 그럼 무엇일까?" "우리는 밥을 '밥'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했다."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는 것은 덤이었다.

     밥이라는 기표의 이질성을 동시에 '나'를 지칭하는 여러 명사들로 바꿔보면(동일시) 언어의 위상이 존재를 존재자로 바꿔버리는 역능을 사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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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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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개국어 능력자님의 댓글

    0개국어 능력자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언어는 규칙입니다. 말하고 듣는 것은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규칙이라면, 읽고 쓰는 것은 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규칙이라 생각합니다.
    원만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려면 말하고 듣는 게 가능해야 하고, 원만한 사회와의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청구서나 신청서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하니까요.
    어쩌면 까막눈은 사회와 소통을 맺을 수 없는, 사회로부터 배제 당할 위험에 처한 존재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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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수업시간 선생님 몰래 옆 친구에게 건넨 쪽지나
    스승의날 선생님께 전한 롤링 페이퍼는
    개인과 소통하는 글 아닐까요~

    방학을 알리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나
    "차렷, 열중셧, 선생님께 경례"하는 반장의 목소리는
    사회와 소통하는 말 같습니다!

    기본학교 3기 권태은 님의 소개가 초등학교 감성을 되살려주네요 :)
    https://www.koreafilm.or.kr/movie/PM_009626

    그보단 '옆사람 몰래 할 수 있다', '시간을 견딘다'는 특성이
    수천 년간 말과 글을 구분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말도 글도 1과 0으로 치환해 기록하는 2024년엔
    통신망을 돌고 돌아 뜻밖에 옆사람에게 갈지 모르고
    데이터센터 수십 곳에 복제해 놓을 수도 있어
    어쩌면 모양이나 색깔과도 구분이 모호해지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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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개국어 능력자님의 댓글의 댓글

    0개국어 능력자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아 ㅋㅋ 맞아요. 수업시간에 건넨 쪽지, 롤링페이퍼라는 예외도 있었네요. 그런데 결국 쓰기와 읽기를 배우는 가장 큰 목적은 사회와 원만하게 소통하기 위함이라 생각해요. 어쩌면 할머니들이 읽기와 쓰기를 못하셨던 이유는 사회와 소통할 필요가 없거나 그럴 일이 없었던 환경에 놓였던 게 아닐까 싶어요. 창훈님의 댓글을 보니, 물론 먼 미래에는 각종 우편물이 음성 또는 영상 메시지로 전달되어 읽거나 쓸 일이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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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목적은 누구의 목적인지, 배우는 목적이 하나로 고정돼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쓰기와 읽기를 교육과정에 넣는 정부 지도자는 '구성원이 사회와 원만하게 소통하길 바라는 목적'이 분명할지 모르지만
    쓰기 읽기를 배우는 유치원생 또는 초등학생이 '나는 사회와 원만하게 소통하길 바라므로 쓰기와 읽기를 배운다'는 목적의식을 가질까요.
    칠곡 할머님들의 시가 꼭 사회와 원만하게 소통하기 위한 목적으로부터 탄생했을까요!
    https://www.nwna.or.kr/bbs/board.php?bo_table=free&wr_id=1677

    국가 정도의 큰 사회와 직접 소통할 필요나 기회가 없다면 쓰기 읽기의 필요가 줄어들 수 있겠다는 추측에 공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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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개국어 능력자님의 댓글의 댓글

    0개국어 능력자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언어라는 게 규칙이고 이 규칙은 사회가 정한 것이잖아요? 단순 말하고 듣는 것을 넘어, 제대로 읽고 쓰겠다는 것은 사회가 정한 규칙을 더 엄격하게 따르겠다 것입니다. 물론 모든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 목적의식을 갖고 읽기와 쓰기를 공부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자발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공부하는 유치원, 초등학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사회와 원만하게 소통하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읽고 쓰는 이유는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를 넘어 더 다양한 집단, 계급, 국가와 원만하게 소통하기 위함이니까요. 과학자와 소통하고 싶은데, 주변에 과학자가 없다면 과학 관련 서적을 읽어 간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고요. 아니면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생각을 전해 소통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래에는 문자로 이루어진 편지보다 영상 편지가 더 보편화될 수 있으니 읽기와 쓰기가 이전과는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칠곡 할머님들이 글을 배운 이유는 사회와 원만하게 소통하기 위한 목적이 맞다고 봅니다. 사회라는 건 집단이잖아요. 가족이나 동네도 하나의 사회겠지만 더 많은 사회와 원만하게 소통하기 위해서 글을 배우신거라 생각합니다. 시를 쓴 이유도 자기만족이실 수도 있겠지만 결국 더 큰 사회와 소통하기 위함이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단순 동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만족하고 계셨다면 글을 배우지 않았겠죠. 그리고 사회통합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인문해교육에도 참여하지도 않으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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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사회가 정한 규칙을 더 엄격하게 따르겠다"는 결심에
    '말하고 듣는 일'과 '쓰고 읽는 일'을 구분해야 할까요
    사투리 쓰던 경상도, 전라도 친구가 서울 올라와 표준말 배우기도 하지 않나요!

    가족을 넘어 더 다양한 사회와 소통하는 데
    꼭 글만 사용하진 않습니다
    중국어나 영어를 글로 접하기보단 말하고 듣길 원하는 사람이 꽤 있지 않나요!

    힘 센 누군가가 목적을 못박는다고
    수많은 '나'들의 마음에 그대로 새겨지진 않습니다.
    웅장한 목적의 훈민정음(1446)은 한반도에서 자리잡는 데 500년 걸렸습니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91_0020
    외려 제각각의 야망이 터지고서야 그 목적지에 이르는 것도 같습니다.

    그들을 만나본 적 없어 조심스럽지만
    '칠곡 가시나들'의 문장은 국립국어원 맞춤법과 어울리나요.
    https://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27234
    말소리, 또는 그 이전의 '나'가 그곳에 머물러 있어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드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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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개국어 능력자님의 댓글의 댓글

    0개국어 능력자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일단 제가 말한 '사회가 정한 규칙'은 언어의 규칙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사투리나 표준어도 결국 한글을 쓰잖아요? 같은 언어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경상도, 전라도 친구가 서울에 올라와 표준말을 배운다고 하셨잖아요? 이건 사회보다 사람과 소통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읽고 쓰는 것은 사회와 소통하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서울의 복지 혜택이나 지원사업을 이용하려면 결국 읽고 쓰는 과정을 거쳐야 하잖아요? 물론 창훈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읽을 때도 있지만요.

    중국어나 영어를 글로 접하기 보다, 말하고 듣길 원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이것도 사회와 소통하길 바라는 게 아니고 사람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거에 가깝다고 봐요.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어, 영어권 사회와 소통을 하고 싶다면 읽고 쓰는 능력을 배우겠죠? 가장 대표적으로 이민이나 유학, 워킹 홀리데이, 해외 취업으로 손해보지 않고 살아가려면 읽고 쓰는 능력이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하니까요. 제대로 못 읽으면 사기 당하잖아요.

    링크로 남겨주신 훈민정음 해례 후서를 보더라도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게 된다." 라고 써져 있잖아요? 송사 과정이 구술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문서로 다뤄지기도 하잖아요? 수 많은 목적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울 수 있겠지만, 궁극적인 가치는 이 사회와 원만하게 소통하여 내 삶을 지키기 위함이라 봅니다.

    <칠곡 가시나들>의 할머니들의 문장은 국립국어원의 맞춤법까지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흰색 동그라미 안에 노란색 동그라미를 그려 넣으면 계란 후라이를 떠올리잖아요? 굳이 계란 후라이를 정교하게 그리지 않아도 흰색 동그라미 안에 노란색 동그라미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계란 후라이를 떠올리듯 할머니들도 국립국어원 맞춤법까지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맞춤법이 어긋나더라도 자신이 지시하는 바를 가리킬 수 있을 만큼 쓰고, 누군가가 지시하는 바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읽을 수 있다면 문제 없다고 봐요.
    프랑스 같은 나라는 복지혜택 신청을 할 때 맞춤법이 어긋나면 처리를 하지 않을 정도로 빡빡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잖아요? 민원을 넣더라도 맞춤법이 어긋났다고 무시하지 않잖아요? 맞춤법이 어긋난 쓰기여도 우리나라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데 문제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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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주민센터 공무원 분들이나 은행원 분들께서 어르신들께, 또는 양식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께 말로 설명해주기도 하시잖아요~
    읽기 쓰기에 서툴러도 세상이 그렇게 모질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

    읽고 쓸 줄 알면 사회와의 소통이 말끔히 끝날까요!
    신문기자 분들은 굳이 현장에 찾아가 말로 묻습니다. 그러곤 다시 글로 적어야 하는데도요~
    때론 보도자료 문구 의미를 정부기관 대변인에게 낱낱이 따지고요!

    그리고 ‘글’이 큰 사회와 밀접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레너드 믈로디노프’라는 분이 <The Upright Thinkers(2015)>라는 책에서 4번째 주제로 문명을 다루는데요,
    https://www.amazon.com/Upright-Thinkers-Journey-Living-Understanding/dp/0307908232

    - 말은 생물학으로 설명할 진화의 산물이다. 글은 발명이다.
    - 말이 인간의 특질이라면, 글은 문명의 특질이다.
    - 3000개 넘는 언어 중 백여 개만 문자가 있다. 그런데 백여 개 중 독창적인 발명은 많아 봐야 4개다 (문자의 등장은 그만큼 별난 사건이다).
    - 대다수는 메소포타미아(기원전 3000년)와 멕시코(기원전 900년) 문자가 뿌리다. 이집트(기원전 3000년), 중국(기원전 1500년) 문자도 독자적인 발명일 가능성이 있다.
    - 나머지는 위 문자를 빌렸거나 변형했다.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부턴 학자의 권위를 빌려야겠습니다 :)
    이 이상이기엔 제 두께가 얕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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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개국어 능력자님의 댓글의 댓글

    0개국어 능력자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은행원 말만 믿고 펀드에 가입했다가 원금을 몽땅 날린 어르신 관련 뉴스 종종 접하잖아요? 결국 읽지 않거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할 때마다 항상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와 건강하게 소통하며 관계를 맺으려면 적어도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게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이라 생각해요.

    언론은 시민이 사회를 볼 수 있는 창의 역할을 하잖아요? 그만큼 시민이 보다 선명한 창으로 세상을 보려면, 기자는 확인된 사실을 작성해야 하므로 불가피하게 현장에서 직접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기자는 사회와 소통을 하기 위해 듣는 게 아니라, 시민에게 더 정확한 사회를 보여주기 위해 듣는 거라고 생각해요.

    '레너드 믈로디노프'라는 학자를 통해 말과 글에 대해 더 배울 수 있었네요. 한국어로 써진 책이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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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0개국어 능력자시면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우셨겠군요!
    ‘0개’나 ‘국어’보다 ‘능력자’에 눈길이 가네요 :)

    요새 만기가 돌아온다는 홍콩 ELS와 마주 닿네요.
    https://biz.sbs.co.kr/article/20000152376
    금융상품을 못다 이해한 게 읽고 쓰는 능력이 부족해서일까요.
    사람의 기본이 그대로인 채 같은 내용을 말로 들으면 다 알까요.
    말 또는 글의 옷을 입기 전, 개념의 문제에 가까워 보이네요!

    글로 읽어도 말로 들어도 곧장 파악하긴 무리지만
    선택의 순간,
    규격을 갖춘 문서 앞에선 꿈쩍 않던 마음이
    다정한 몸짓과 친근한 목소리엔 꿈틀대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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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개국어 무능력자님의 댓글의 댓글

    0개국어 무능력자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아 ㅋㅋㅋㅋ 닉네임은 아무 생각없이 만든건데 ㅠㅠㅠ 바꿔야지..!

    최소한의 읽기 능력이 부족하면 금융상품 설명서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읽기 능력이 갖춰져 있어도 개념이 부족해서 이해하지 못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읽기 능력이 갖춰져 있다면, 사전을 들쳐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 초등학교 때 국어사전, 옥편, 영어사전으로 단어를 찾아보는 시간도 가졌었거든요. 읽기 능력이 갖춰진 상태에서 사전만 들춰볼 수 있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개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많은 금융인들도 금융상품은 그 자리에서 가입하는 게 아닌, 상품설명서를 집으로 가져가서, 곰곰히 읽어보고 판단하라고 하잖아요? 그 이유도 그 자리에서는 상품 설명서에 있는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솔직히 은행 창구에 있는 직원의 절반도 상품설명서에 있는 내용을 하나 하나 다 물어보면 모를겁니다. 우리나라 금융상품의 수가 상당히 많으니까요. 결국 모르는 게 있다면 스스로 공부한 다음 판단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라는 뜻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공부하려면, 읽기 능력이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외에도 대부분의 사기 범죄는 제대로 읽지 않거나 읽지 못해서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요. 물론 듣기와 관련된 읽기와 큰 관련이 없는 보이스 피싱 같은 다양한 사기 범죄가 있지만요.
    고로 사회와 건강하게 소통하려면 최소한의 읽기 능력이 갖춰져야 한다고 봅니다. '칠곡 가시내들' 할머니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문해교육들이 이러한 목적을 갖고 있고, 교육에 임하시는 분들도 비슷한 목적일 거라 생각해요.

    그것보다 표현이 정말 시적이네요. 비유에서 몽글몽글한 감성이 느껴져서 그런지, 봄에 여러 명의 이성을 끌어당길 수 있을 법한 마성이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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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저는 스물을 제법 넘고서야 사전을 본격 사용하네요!
    https://ko.dict.naver.com/#/entry/koko/1eb533cdde804b3a8eb05310b7e80076
    그래도 단어 고르는 시간보다 생각 가다듬는 시간이 몇 배네요 :)

    성별은 물론, 세대와 언어를 넘나드는 마성을 욕망합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128525
    조현욱 님께서 까치 출판사 통해 <The Upright Thinkers(2015)>를 한글로 바꾸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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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주현님의 댓글

    염주현 아이피 (211.♡.81.3) 작성일 Date

    저도 최근 들어 "의사소통"에 생각이 꽂혀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본학교 이외의 기타 일상의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어머니와 대화가 안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 무엇이 달라졌는지, 내게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나는 의사소통을 왜 하는지, 나는 의사소통을 누구를 위해 하는지,
    또 사유에 탕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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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석님의 댓글의 댓글

    김민석 아이피 (175.♡.230.114) 작성일 Date

    언어의 균열을 포착하는 지점을 만난 것 같습니다. 의식적 사유에 있어서 의사소통이 언어의 지배적 기능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겠지요.
     언어와 실제의 차이, 언어와 존재의 차이,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 이 끊임없는 분열의 지점이 언제나 불안을 야기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