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의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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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한 접시에 물을 따른다. 금세라도 넘칠 듯 하다.
여기에 야구공만한 돌을 던져본다. 물이 넘칠 뿐 아니라 그릇이 깨져버린다.
두툼하게 만들어진 국그릇에 물을 채운다.
여기에 다시 돌을 던져본다. 물은 넘쳐 흐르고, 국그릇에는 물이 얼마 남지 않는다.
한아름 크기의 달항아리에 물을 채운다.
여기에 돌을 던져본다. 물은 넘쳐 흐르지만, 항아리에는 여전히 물이 가득하다.
수영장에 물을 채운다.
여기에 돌을 던져본다. 물이 넘치지 않는다. 수면에 생겼을 변화조차 미미하여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그릇이 크면,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릇이 작으면, 별것도 아닌 일에 온 존재가 반응하며 어수선을 피운다.
수영장의 물은 온 동네 사람들을 품고도 남지만, 국그릇의 물로는 라면 하나 끓이기도 버거운 것이다.
나는 접시인가, 국그릇인가? 이 질문은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떻게 내 그릇을 키울 것인가? 야망, 지식욕, 그리고 운동.
Pablo Picasso, Ceramic col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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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나는 접시인가, 국그릇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의 일종 아닌지요!
내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아야 내 안에서 야망도 지식욕도 솟아나지 않을까요!
운동으로 내 그릇을 키울 수 있는지 몰라도, 내가 접시일 때 할 운동과 내가 국그릇일 때 할 운동이 다를 것 같습니다!
한상도님의 댓글의 댓글
한상도 아이피 (110.♡.46.236) 작성일 Date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최진석 교수님 글을 읽고 나서,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게 의미가 없다고 믿게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그릇을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우리는 자기가 가진 기질과 천성에 맞는 큰 그릇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자처럼 말이지요. 제3자가 “이 사람은 종자야, 저 사람은 양재기야”라고 할 수는 있지만, 자기가 스스로를 종지라고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종지라고 하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양재기라고 생각해야 해요. 자기에게 자기 자신은 항상 커야 합니다.
http://kor.theasian.asia/archives/341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