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그린 그림, 내가 보고 싶은 그림
페이지 정보
본문
동네 산책을 하다가 어린이 미술학원 앞에 놓여진 그림을 만났다. 빈 도화지에 물감과 크레파스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고, 다른 도화지에 그린 그림을 가위로 오리거나 손으로 찢어서 붙여놓은 것 같다. 이 그림은 미술학원에서 전시 목적으로 내놓은 게 아닌, 작품을 자연건조 시키기 위해 밖에 내놓은 것 같다. 그래서 그림의 제목은 모르겠지만 주제는 도시로 보인다. 어른의 시선으로 한 마디 이 그림에 제목을 붙이자면 '삭막한 도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세련된 느낌으로 이름을 붙인다면 '신도시'라 하고 싶다.
그림을 들여다 보면, 빌딩과 자동차가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건물과 자동차가 큼지막 하게 그려져 있어 사람의 존재감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략 3명 정도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길거리 고양이와 크기를 비교해보면 존재감이 상당히 약하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면, 도시가 인간을 집어 삼킨 것처럼 느껴진다.
도시는 물리적인 도시인 빌(Ville), 정신적인 도시인 시테(Cite)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아이가 그린 도시는 물리적인 도시인 빌(Ville)이라 볼 수 있으며, 정신적인 도시인 시테(Cite)는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실제 살아가고 있는 도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대도시를 들여다 보면, 빌이 시테를 온전히 집어 삼킨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멀리서 보면, 물리적인 것들이 도시를 이끌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시를 확대하여 가까이 다가서면 정신적인 것들에 의하여 도시가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시의 탄생은 빌이라면, 호흡의 시작은 시테이다. 이것이 건강한 도시, 살아 숨쉬는 도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어린이 미술학원 앞에서 만난 이 그림에는 문화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다. 시테가 구현되지 않아 상당히 삭막한 도시처럼 다가온다. 이런 풍경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신도시다. 새로운 아파트와 건물들이 바삐 올라가느라 시민들이 특별히 활동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원하는 활동을 하기 위하여 자기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로 향하게 된다. 결국 시민은 동네를 잠시 떠나거나 자신의 집으로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신도시는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가기 바쁘기 때문에 사람들이 활동하는 문화적인 공간, 정신적인 도시인 시테(Cite)가 깃들기 힘들다. 신도시가 완전히 갖춰지고 시민들이 살아 숨쉴 때에야, 도시의 주도권은 빌에서 시테로 넘어간다. 난 이 작품을 만든 아이가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 모르겠지만,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도시'를 주제로 하여 위와 똑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그때에도 아이가 빌을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었다면, 아이가 살고 있는 도시는 시민들이 살아 숨쉬지 못하는 건강하지 못한 도시라 볼 수 있다.
반대로 아이의 작품에 시테가 깃들이 시작하여 도화지에 건물과 자동차를 가득 채우지 않고 문화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채워 나간다면, 호흡을 시작하는 도시라 볼 수 있겠다. 물론 아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주도권이 시테(Cite)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가 살아 숨쉬는 시민이 아니라 공부하는 기계로 산다면, 도시를 그릴 때 시테를 보지 못하고 빌에만 초점을 맞춰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다.
물론 아이가 도시라는 같은 주제로 같은 그림을 그린 다음 이곳에 전시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다만 아이가 도시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물리적인 도시인 빌(Ville)이 아닌, 정신적인 도시인 시테(Cite)에 초점이 맞춰졌으면 좋겠다. 내가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는 빌딩 숲이 아닌, 빌딩 숲을 살아 숨쉬게 하는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테가 잘 구현된 그림을 굳이 꼽자면 모네의 '카퓌신 대로'가 아닐까.
(* 이 글을 쓴 이유 사진을 올려보고 싶어서.)
- 이전글[회독하다_서평]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23.11.30
- 다음글[SF] 90년대생들의 비밀 2 23.11.27
댓글목록
한상도님의 댓글
한상도 아이피 (39.♡.231.23) 작성일 Date저는 아이의 그림이 굉장히 역동성 있게 느껴졌습니다. 다양성도 보이고요. 시테가 보입니다. 자유게시판에서 그림을 보니 기분이 매우 좋네요.
변진영님의 댓글의 댓글
변진영 아이피 (223.♡.218.162) 작성일 Date
오 그렁가요? 저는 도시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림 속에 베드민턴, 피크닉, 그림 그리기, 악기 연주 등의 활동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인간의 활동이 드러나는 풍경은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있는데요. 생각해보면 서울처럼 오래된 도시에서도 볼 수 있었어요. 가장 대표적으로 분수대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 한강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 한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대표적입키다. 그런데신도시에서는 출퇴근, 등하교, 다른 건물로 향하는 사람들 외에는 딱히 보기 어렵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