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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의 설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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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서유진 (156.♡.59.37)
    댓글 댓글 2건   조회Hit 10,644회   작성일Date 24-03-20 06:58

    본문

    칠판 위에는 고요하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다섯 개의 수학 문제가 적혀 있었다. 그것들은 어떤 섬세한 손길에 의해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한 목적을 품고 남겨진 것처럼 보였다. 이는 단순히 수학 문제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다섯 개의 문제는 누군가의 의도가 담겨져 있었으며, 그날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암시하는 신호탄이었다. 이날은 평소와 다르게 문제 풀이의 주체가 학생이 되는 날이다. 지목 당한 몇몇 학생들이 문제를 풀고 이를 설명하는 시간으로 채워질 것이다. 


    학생들이 지목당할 때가 되자, 학생들의 태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  

    모든 문제를 풀고 설명할 수 있는 학생, 일부의 문제만 풀고 설명할 수 있는 학생, 단 하나의 문제도 풀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 학생.


    모든 수학 문제를 해결하고 설명할 수 있는 듯한 학생이 있었다. 그는 주변을 조용히 응시하며, 마치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듯한 침착함과 자신감을 발산했다. 그의 눈빛에서는 단순한 수학 문제를 넘어서는 깊은 이해와 포괄적인 사고의 깊이가 느껴졌다. 이런 모습에서 그는 뭔가 믿음직하고 안정적인 기운을 풍겼다. 그의 태도와 자신감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에게 돈을 맡긴다면 적어도 10%의 이익을 보장받을 것 같은 신뢰감을 줬다. 이 학생의 모습은 단순한 학문적 성취를 넘어서, 인생의 다양한 상황에서도 뛰어난 판단력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상징처럼 보였다.


    일부의 문제만 풀고 설명할 수 있는 학생은 번쩍 손을 들어 문제 풀기를 자원했다. 이 간단한 제스처 뒤에는 단순한 자신감이 아닌, 심층적인 계산이 숨어 있었다. 그의 선택은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만 안전하게 이동하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했다. 즉, 그는 자신이 자신 있는 문제들에만 도전함으로써, 공개적인 상황에서의 실패와 그로 인한 망신을 회피하려 했다. 이러한 전략은 아마도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욕구 중 하나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약점을 숨기고 강점만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 문제를 다 풀고 나면, 다섯 개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한 듯이 우쭐거리는.


    칠판의 모든 문제들을 풀지도 설명할 수 없는 학생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쉬는 시간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지금은 폭풍의 중심에서 고요를 찾은 듯 시간과의 씨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고개 숙임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다.그의 고개 숙임은 겸손하다기보다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완전한 체념의 표현이었다. 이는 전쟁터에서 싸움도 항복하는 법도 모른 채, 단지 이 어려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어있는 겁쟁이 군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는 교실의 학생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풀어내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일부만 풀어내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 풀어내지도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 사람도 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유형은 자신의 감정을 깊게 이해하고, 이를 조용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신의 고유한 감정의 본질을 선명하게 마주하여 이를 드러낸다. 그래서 듣는 이로 하여금 그 감정의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두 번째 유형은 자신의 감정을 부분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특정 개념이나 사상을 도구로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려 하지만, 고유한 감정의 모양을 완전히 포착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큰 목소리나 강한 어조로 채워넣는다. 그것이 거짓된 확신이라는 것도 모른 채.

    세 번째 유형은 자신의 감정을 전혀 설명할 수 없어 선택적인 침묵이나 고개 숙임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내면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그 결과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감정의 복잡성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에 가깝다. 


    "나 어디가 예뻐?" 라는 질문에, 어떤 답변도 하지 못하고 머뭇머뭇하는 사람이 있는까 하면, "너의 모든 게 다 예뻐." 와 같은 재미없고 식상한, 3류 로맨스 드라마 남자 주인공 대사를 뱉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답변은 정리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털어놓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난 네 눈이 가장 좋아. 너의 맑은 눈망울은 강한 혼란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을 것 같거든. 날 바라봐주는 네 눈빛은 내 신념을 잃지 말라는 응원처럼 느껴져. 그런데 아까 옆테이블 존잘남을 응원해주더라? 그 눈빛은 나에게 하나도 예쁘지 않아." 처럼 잠을 부르는 표현이지만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왜 초등학교 방학숙제로 일기가 항상 빠지지 않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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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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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흘려 읽고 "넌 눈이 예뻐"라며 시작하다간 큰일 나겠네요 :)

    수학문제와 마음 사이 은유가 가장 멋지고
    추상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솜씨도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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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주현님의 댓글

    염주현 아이피 (119.♡.196.68) 작성일 Date

    "나 어디가 예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드디어 심판의 순간이 왔다.
    이 질문에 중간은 없다. 만족할 만한 답을 하면 점수를 얻을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 나는 끝날 것이다.
    긴장감과 두려움에 내 몸과 눈빛은 경직되었지만, 아드레날린의 힘으로 머리는 빠르게 굴리고 있다.
    단순한 답변은 안된다. 진부한 답변도 안된다. 회피성 답변도 안된다. 너무 솔직한 답변도 안된다. 너무 모호한 답변도 안된다. 화장실 갔다와도 안된다. 지긋이 바라보다 키갈해도 안된다.
    답변을 해야한다.
    어서!
    나는 여유로운 척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음~ 어디 보자. 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