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로그인
  • 참여
  • 자유게시판
  • 참여

    자유게시판

    생각의 시작은 언제일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변진영 (218.♡.110.45)
    댓글 댓글 5건   조회Hit 39,998회   작성일Date 23-12-29 17:52

    본문

    0c2a058a021e66cd5e68b8848a7583ee_1703857709_3646.jpg
     


    생각의 시작은 언제일까!?!?!?!?!??!?!?!?!?!?!?!?!?!?!?!?!??!?


    최진석 교수님은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다. 

    "컵을 컵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부분 컵이라 판단하고 시선을 거둔다. 하지만 컵으로 시선을 끝까지 붙이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본다." 

    이어서 함민복 시인의 '섬'을 읊어주신다. 다른 사람들은 섬이라 판단하여 시선을 거둘 때, 함민복 시인은 섬을 끝까지 들여다보며, 섬을 '물 울타리'로 표현했다. 끝까지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최진석 교수님의 말에 그치지 않았다. 시선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만이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닿을 수 있다. 셜록 홈즈처럼.

    생각의 시작은 언제일까?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들여다 볼 때인가 아니면 감정을 소멸시키기 위해 고도의 이성을 세공할 때인가. 답은 감각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감각의 방향을 설정할 때이다. 모든 생각은 감각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시인 함민복을 말하면 최진석 교수님의 앵무새 같으니, 셜록 홈즈로 말해야 겠다. 셜록홈즈는 고도의 이성과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다. 셜록홈즈는 영화 어벤저스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힘이 아닌 소름 돋는 추리로 빌런을 제압한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그래서 홈즈는 우리나라에서 뇌섹남 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셜록홈즈로 빙의하여 고도의 이성과 합리적인 추론을 추종한다. 하지만 셜록 홈즈의 시선을 본받으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셜록 홈즈가 내보이는 모든 추론은 보는 것, 듣는 것, 맡은 것 등 고도의 감각의 방향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걸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셜록홈즈가 왓슨이 궂은 날씨에 외출했다는 사실, 왓슨의 하녀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추리를 통해 밝혀내어 왓슨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런데 이 추리는 왓슨의 왼쪽 구두 안쪽에 있는 자국을 보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시선을 구두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왼쪽 구두 안쪽에 있는 자국까지 닿게 하였기에 추리할 수 있었던 셈이다. 물론 셜록 홈즈는 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왓슨의 오른쪽 검지에 묻은 질산 자국과 요오드 포름 냄새를 바탕으로 왓슨이 개인 병원을 차렸다는 걸 알아차린다. 몇몇은 셜록홈즈가 질산 자국, 요오드 포름 냄새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방대한 지식에 경이를 표하지만, 왓슨의 오른쪽 검지에 묻은 질산 자국까지 닿게 만드는 인위적인 시선, 요오드 포름 냄새를 따라가 알아차리는 집요한 개코가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추리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제대로 된 판단을 하려면,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믿음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믿음은 시선이 닿기도 전에 판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은 감각의 방향을 잃게 만들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원인이다. 과도한 믿음은 '배제하지 말아야 하는 불편함'과 '이질적인 핵심 정보'를 무시하여 현실에 어긋난 추론을 전개하게 만든다. 스스로가 오류를 자초한 셈이다. 고로 가장 합리적인 판단, 추론을 하고 싶다면 이성과 이론을 가장 먼저 앞세우는 게 아니라, 생각하려는 대상에 시선을 끝까지 고정시킬 수 있는 집요한 관찰을 맨앞에 세워야 한다.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이성과 이론에만 의지하는 것은 누군가가 세워놓았던 판단 기준에 의존하는 단순 사고를 반복하는 셈이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여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게 아니라, 노예적 기질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꼴이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말이다. 적극적인 관찰이 없는 사고는 현실을 왜곡하여 바라보게 만드는 수동적인 판단에 그칠 뿐이다. 생각의 시작이 감각의 방향인 이유, 시각의 방향인 시선이 중요한 이유다. 감각의 영점 조절은 생각의 기본이다. 그래서 최진석 교수님은 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게 아닐까. 


    셜록 홈즈의 명석함은 어디서 드러나는가.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추론인가, 아니면 감성과 감정을 배제시킨 상태로 합리성을 발아시키는 냉철한 이성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의 왼쪽 구두 안쪽의 자국과 지팡이에 묻은 흙먼지도 놓치지 않는 집요한 시선을 앞세웠기에 가능한 것이다. 감각을 바탕으로 현재 놓인 상황을 판단하여 방대한 지식들을 활용하여 합리적으로 추론해 나간다. 적어도 합리적이고 냉철한 셜록 홈즈처럼 생각을 하고 싶다면 고도의 이성과 이론, 비판의식에 심취할 게 아니라, 끝까지 보거나 끝까지 냄새를 맡으려는, 끝까지 소리를 들으려는 연습이라도 해야 한다. 이는 최진석 교수님이 말씀하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의 시작이다.


    사고가 내 시선을 앞서는 순간, 사실과 어긋난 추론과 생각을 낳게 된다. 고로 제대로 된 생각을 하고 싶다면, 사고가 내 시선이 앞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시야 밖에서 사고가 마음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한 순간에 멍청함이란 진영에 매몰되는 꼴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셜록 홈즈도 다르지 않다. 그는 사고를 하기 전에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 어느 쪽으로 감각의 방향을 정하여 정보를 수집할 것인지 판단할 줄 안다. (*이는 영국 드라마 '셜록'에서 매우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고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구체적인 동기가 중요하다. 목표의 틀이 없다면 어느 쪽으로 감각의 방향을 설정하여,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활용해야 할 것인지 판단할 수 없으며, 이성으로 세공한 날카로운 추론까지 이어질 수 없다.


    내가 믿고 있던 세상과 가치 판단 기준을 바탕으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상황과 시대에 따른 끊임없는 입증 요구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정보로도 말할 수 없을 때가 있으며, 순수하게 관찰한 것만으로도 지식이 부족하여 판단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앞에 놓인 상황에서 그나마 나은 판단을 하려면,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 어디로 시선을 닿게 할 것인지, 감각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연습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의 시작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시선의 높이, 생각의 깊이, 폭 넓은 사고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감각의 영점조절이 아닐까.





    (* 이렇게 말하면 내가 생각을 겁나 잘하고 시선을 끝가지 고정시킬 줄 아는 집요한 사람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추천5 비추천0

    댓글목록

    profile_image

    한상도님의 댓글

    한상도 아이피 (1.♡.46.95) 작성일 Date

    저도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더 잘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묻는다면, 저는 야망이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저는 말씀하신 '감각의 예민함을 유지하는 상태'를 '더 잘 관찰하는 상태'로 해석했는데요, 저는 인간이 더 잘 관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관심있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고, 그렇지 않은 것에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셜록 홈즈가 더 잘 관찰할 수 있었던 이유, 더 예민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주어진 상황이나 사건을 더 잘 인식하고 싶었던 강한 인식욕이 삶을 지배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rofile_image

    변진영님의 댓글의 댓글

    변진영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맞습니다. 감각을 더 예민하게, 감각의 영점을 조절하게 만드는 게 무엇이냐 묻는다면, 원하는 것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각의 방향을 조준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글에서 언급했던 구체적인 동기, 목표의 틀)이 정해져 있어야 하니까요. 셜록홈즈 <얼룩무늬 끈의 비밀>에서도 원하는 게 분명하다는 걸 느끼게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셜록홈즈는 의뢰인이 결혼을 하고 나면 보수를 줄 수 있다고 말하자, "저는 이 일 자체가 보수입니다. 형편이 좋아지면 사례해 주세요." 같은 식으로 말하거든요. 그만큼 자신의 일을 사랑한 것처럼 보입니다.
    (* 망상 주의)
    그렇다면 상도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셜록 홈즈에게 ‘상황과 사건을 제대로 인식하고 싶었던 강한 인식욕’을 이끌어낸 소명은 무엇인가?> 인데요.
    제 얕은 생각으로는 국가의 폭력성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소명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해, 법치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소명이죠.

    작품 속 홈즈는 1854년도에 태어났는데요. 근대적 세계에 살고 있었겠죠. 이는 홈즈의 태도에서도 볼 수 있는데요. 그는 성욕과 같은 순수한 동물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제시키고 이성을 숭배하는 전형적인 근대적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왓슨도 셜록홈즈를 ‘추리하는 기계’ 정도로 표현을 합니다. 이를 시대에 맞게 보정을 한다면, 추리AI, 추리 슈퍼컴퓨터 정도로 해석해야 한다고 봐요. 이 소설이 쓰여질 때의 기계란 존재는 지금의 AI, 컴퓨터처럼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률을 보여주던 존재였으니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AI라는 별명울 붙이면 감성과 감정을 배제한 존재처럼 다가오듯, 왓슨 또한 홈즈를 이성을 숭배하는 사람처럼 묘사했습니다.
    당시 이성을 숭배한 사람들은 전체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적인 성향을 바탕으로 식민정책을 펼쳤잖아요? 그런데 셜록홈즈는 조금 다른 주의를 수호한 것처럼 보입니다. 앞서 말한 법치주의입니다. 근대 이전에는 고문을 통하여 자백을 이끌어냈다면, 홈즈는 합리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상대의 자백을 이끌어냅니다. 어쩌면 홈즈는 고문이라는 국가의 폭력성으로부터 국민들을 지켜야 한다는 소명과 국가의 폭력이 자행되는 시대의 급소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소명을 품고 있었기에 집요한 감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관찰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profile_image

    변진영님의 댓글의 댓글

    변진영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메모장에 써놓은 걸 복사해서 붙여넣기 했는데, 중간에 써놓으려 했던 댓글이 빠져서 추가합니다.
    삭제한 다음에 다시 작성하려 했는데 비밀번호를 몰라서요;;;;;
    이건 (*망상주의) 윗부분에 써놓으려 한 댓글입니다.
    만약 갓난 아기가 오감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났다면, 과연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은 대부분 감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게 많으니까요. 원하는 게 있을 수 있지만 이를 추구하기 위한 집요한 생각까지 도달하는건 힘들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이건 과학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저도 단정짓기가 참 어렵네요.
    어떤 사람들은 셜록홈즈를 원한다는 이유로 합리적인 추론과 이성만 쫓느라 감각을 등한시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잖아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profile_image

    한상도님의 댓글의 댓글

    한상도 아이피 (210.♡.149.16) 작성일 Date

    진영님의 글을 읽어보니, 아래의 두 질문이 저에게 던져진 듯 합니다. 각 질문에 제 생각을 적어보겠습니다.

    1. 오감을 느낄 수 없는 인간도 생각할 수 있는가?
    -> 여기서의 오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오감을 전부 느낄 수 없는 인간이라면 세상을 인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유 자체가 시작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대로 마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1번 질문에 대한 꼬리질문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답해보고자 합니다.

    1-1. 생각을 아주 잘 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그 조건에서 감각은 어떤 역할을 할까?
    -> 저는 생각을 할 때 감각은 도구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도구를 쥐고 흔드는 것은 야망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로 더 예민한 감각을 가진 사람은 섬세하고 뛰어난 도구를 가지고 있으니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쥐고 흔드는 야망이 얼마나 분명한가로 결국 생각의 성패가 나뉘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영님이 말씀하신 '감각의 방향을 어디로 향하게 할 지'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에는 야망이라고 봅니다. 함께 언급하신 '요오드 포름 냄새를 따라가 알아차리는 집요한 개코'에서 정말 중요한건 '개코'보다는 '알아차리는'과 '집요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1-2. 생각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감각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 아주 조금이라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이 있다면 생각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세가지 근거로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첫째, 스티븐 호킹은 20살에 루게릭 병을 판정받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위에 정의된 오감은 온전했을테지만,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충분히 감각을 활용하기는 어려운 삶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티븐 호킹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궁금증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고 봅니다. 둘째, 헬랜켈러는 시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남은 감각을 활용하여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습니다. 그녀의 사회운동은 직접 보고 듣지 않았음에도 사회를 인식하고 직접 생각한 자의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5억년 버튼'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5억년의 시간이 흘러야 탈출이 가능한 곳으로 던져진다는 설정의 이야기입니다. 상상속의 이야기이지만 해당 작품의 주인공은 공허한 공간 속에서, 감각을 활용하기 어려운 곳에서 '생각'을 시작합니다. 그 생각은 '현실이란 무엇인가'에서 촉발하여,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사유를 멈추지 않습니다.

    2. 셜록홈스의 소명은 '법치주의의 수호'인가?
    -> 셜록홈스라는 작품을 거의 보지 않은 상태에서 언급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만, 영드 '셜록' 1편을 본 경험을 기반으로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저는 셜록홈즈가 '~~주의'의 수호를 추구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고 느낀 셜록홈즈는 면밀히 관찰하여 세상을 똑바로 인식하고, 그 인식을 기반으로 문제를 푸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신의 즐거움에 기반한 야망은 보통 '이 세상 모든 난제를 풀겠다'라거나 '지금 발생한 이 문제를 풀겠다'와 같이 활동성 높은 동사의 형태로 표출된다고 보는데, '법치주의의 수호'는 명사의 형태로 구성된 딱딱한 이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로 셜록홈즈에게는 다른 형태의 소명이나 야망이 있지 않을가 생각해봅니다. 제가 본 셜록홈즈의 야망은 '모든 난제는 내가 다 풀어버리겠어' 정도로 보였습니다.

    profile_image

    변진영님의 댓글의 댓글

    변진영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2
    맞습니다. 법치주의는 조금 과합니다. 망상이니까요. 법치주의 외에 마땅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어서 그렇게 붙인 것도 있습니다. 저도 셜록홈즈는 사람들이 보길래 따라서 본거였는데요. 추리소설은 제 취향이 아니더라고요. 저도 전편을 보고 한 말은 아닙니다.ㅠㅠ

    셜록이 “법치주의를 수호하려는 소명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하게 된 계기는 작품의 화자이자, 셜록홈즈의 파트너로 나오는 왓슨의 배경과 대사 때문인데요.
    드라마를 보면, 왓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고 절뚝거리는 신체적 피해와 PTSD라는 정신적인 피해도 안고 살아가잖아요? 이는 전쟁이라는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이기도 하죠.
    소설에서는 왓슨이 셜록의 소름돋는 추리를 듣고 이런 말을 하거든요? “당신이 중세시대에 살았다면 마녀사냥을 당했을 겁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님)
    이처럼 셜록홈즈를 보면 폭력(비합리성), 비폭력(합리성)을 대비시켜 놓은 요소들을 짧게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요소가 인상적이라고 여겨서 혼자 망상을 했죠.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산업혁명 이후로 도시가 생기고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질서가 스며들잖아요? 민주주의에 그치지 않고 법치주의가 들어서고 이 안에 증거제일주의, 3심제도 같은 개념들이 대표적입니다. 셜록홈즈의 시대적 배경과 그가 보여준 행태를 보면, “한 사람을 단죄하려면, 물리력이 아닌 합리적인 추론과 논리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같은 철학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고문을 통하여 자백을 받아내거나, 증거가 없는 논리로 범인으로 몰아가며 폭력을 자행했던 국가와 공권력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결국 망상인데요. 셜록홈즈는 “합리성이 결여된 세상은 폭력적이다.” 라는 시대의 질병을 포착하여 이를 해결하겠다는 소명으로 품고 세상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이 표현을 법치주의 수호 정도로 했습니다. 물론 본인이 재미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전쟁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품고 살아가는 왓슨과 함께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는 듯한 의뢰인의 이야기도 끝까지 들어주고 있다는 점. 사례금을 받지 않고도 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재미, 그리고 난제를 풀겠다는 소명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특히 왓슨과 함께하고 있는 이유는 셜록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제가 본 소설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왓슨이기 때문에 왓슨도 홈즈의 소명이 무엇인지 모르겠죠. 하지만 그의 행태, 주변 사람, 시대적 배경을 보면, 충분히 그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글에서 어벤져스의 히어로를 함께 말한 이유이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