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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시작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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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변진영 (218.♡.110.45)
    댓글 댓글 2건   조회Hit 8,920회   작성일Date 23-12-11 05:3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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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 무엇인가? 상당히 어렵다. 
    사랑은 무엇일까? 자신의 혈육을 아끼는 헌신인가?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의 숭고함인가? 매일마다 연락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친밀함인가?
    난 다양한 유형의 사랑을 살피기 앞서, 사랑의 시작이 어디인지 미술관에 머문 사람들을 통해 발견했다. 사랑의 시작은 길고 긴 시선, 한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한 작품들이 즐비해 있음에도, 사람들의 발길을 끊이지 않도록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이 주위에 가득함에도, 자신이 원하는 작품 앞에 서서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는 것. 이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동요를 일으킨 그림이 미술관에서 가장 가치있는 작품일 것이란 확신에 찬 것처럼 오랫동안 머물며 도화지에 그림을 따라 그리고 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취미와 습관, 말투를 따라하는 걸 넘어 닮아가듯이 말이다.
    그래서 사랑의 시작은 어디에 있는가? 시작은 오랫동안 바라보면서 내 감정의 동요를 들여다 보는 시선이다.

    "나 어디가 예뻐?" 라는 질문에 "넌 눈이 예뻐"라고 답을 한다면, 사랑이 제대로 시작된 것이라 보기 어렵다. 반면에 "난 네 눈빛이 좋아. 고통에 짓눌리는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품위를 지킬 줄 아는 도도함이 드러나 있거든. 너의 눈빛은 '혼란 속에서 강한 분별력'이란 가치를 나에게 선물해 줬어."라고 답을 한다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감정의 동요를 들여다 보고, 동요를 일으킨 부분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눈빛 외에도 상대의 가치를 끊임없이 발굴할 수 있다면 사랑은 더 긴 시간 동안 지속될 것이다.

    이런 멘트는 사기꾼 색끼, 세기의 카사노바 색끼들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내 감정의 동요와 동요를 일으킨 상대방을 오랫동안 바라보려 노력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한 작품 앞에서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림을 따라 그리는 모습이 사랑의 시작을 아름답게 꽃피우기 위한 공부이자 수련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그래서 난 궁금하다. 한 작품 앞에 오랫동안 머무를 수 있는 사람들은 사랑할 때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순수한 사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다 사진만 몰래 찍고 소매치기범처럼 스리슬쩍 자리를 피했을 뿐이다.

    미술관에서 나와 비슷한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작품 앞에 1분도 머물지 못했다. 오히려 작품 앞에서 사진만 찍고 자리를 옮기기 바빴다. 어쩌면 이들은 한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사랑보다 미세한 감정의 동요를 지진이 난 것처럼 받아들여 침대로 빠르게 도망치려 안달난 사람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사진만 찍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모습은 침대에서 모든 것을 불태운 뒤 차갑게 식어버린 가슴을 감추고 자리를 떠나는 사람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물론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은 사람들 중에 혼전순결주의자가 있었다면 사과한다. 하지만 당신이 내세운 혼전순결이란 가치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세운 게 아닌, 누군가에 의하여 주입된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자기 스스로 세운 것이라면 또 다시 사과한다. 하지만 혼전순결이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의 시작이자 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치를 스스로 세웠어도 아름다운 사랑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하고 있다면 다시 사과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사랑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이 오래 지속되었다면 사과한다. 하지만 관계는 20년 동안 지속하였어도 상대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따라오는 고양감을 20년 동안 느끼진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나도 사랑을 겁나 잘하는 사람인 것 같지만 나 또한 그렇지 않다. 나는 작품 앞에 서있는 게 아닌, 작품 앞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사람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사과한다.

    뚜레주르 빵집에서는 새콤달콤 유자파이와 얼그레이 까눌레가 진리다. 모두가 이 메뉴를 열심히 먹어, 단종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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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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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진영님의 글이 제 마음을 흔들어놓네요!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1. '작품 앞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를 발견해 동요를 느끼고, 이렇게 글을 남긴 진영님도 하나의 사랑을 하신 게 아닐까요?

    2. 네 번째 문단, '나와 비슷한 뿌리를 둔 사람'들과 진영님은 어떤 공통점을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3. 진영님께서는 '상대방을 오랫동안 바라보려 노력하는 사기꾼이나 카사노바'와 '사진만 찍고 바삐 자리를 옮기는, 또는 차가워진 마음으로 침대를 떠나는 누군가' 중 어느 쪽을 더 긍정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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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진영님의 댓글의 댓글

    변진영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아 ㅋㅋㅋ 주저리 주저리인데 감사합니다.

    1. 맞습니다 ㅋㅋㅋㅋ 사실 저는 미술관에 있는 작품보다 작품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랑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작품을 보지 않고 사람들만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15년 동안 한 사람만 짝사랑한 이야기, 3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을 아직까지 그리워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여기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생각해요.

    2. 가장 큰 공통점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대륙이라 생각해요. 저기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였는데요. 한 작품 앞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은 실제 거주하는 대륙이 유럽이 아닌 다른 곳에 위치한 사람들이었어요. 같은 한국 또는 동양 사람이어도 유럽에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유롭게 작품 앞에 앉아 즐길 줄 알았거든요. 저 사진 속 여성분 또한 동양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거주하고 있는 대륙이 유럽이 아닌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 내에 많은 걸 경험하고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어요. 이는 동양인 뿐만 아니라 서양인도 비슷하게 적용되었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을겁니다. 런던에만 이주일 동안 머물렀던 한국 사람을 만났었는데요. 그 분은 내셔널 갤러리, 지질박물관을 10번도 넘게 갔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 분이 한 작품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3. 언급하신 사람들은 큰 틀에서 보면 모두 같은 유형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굳이 분류한 다음 긍정하는 쪽을 꼽자면, 카사노바입니다. 사기꾼은 상대를 기망하려는 의도가 녹아있기 때문에 진심이 부족하죠. 사진만 찍고 자리를 떠나는 사람, 차가워진 마음으로 침대를 떠나는 사람 또한 진심이 완전히 식어있는 상태입니다. 카사노바도 유형이 다양하게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몇몇은 한 사람을 오랫동안 바라보지 못할 뿐, 사랑할 때 만큼은 진심과 영혼을 담아 임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파블로 피카소처럼요. 피카소는 연인이 바뀔 때마다 그림이 바뀌었거든요.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글씨체를 바꾸는 게 쉽지 않듯 피카소처럼 여자가 바뀔 대마다 그림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한 사람에게 온전히 정착하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때만큼은 얼마나 진심을 다했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