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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질문은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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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주현 (218.♡.110.45)
    댓글 댓글 9건   조회Hit 76,064회   작성일Date 23-12-04 07:25

    본문

    기본학교의 특정 기수 반장은 모든 질문이 괜찮다고 했다. 정리되지 않더라도 중언부언하더라도 모든 질문이 괜찮다는 것이다. 난 이 말을 듣고 기본학교 반장다운 답변이라 생각했다. 만약 정리되지 않은 질문이 괜찮지 않다고 말을 했다면, 기본학교의 특정 기수 뿐만 아니라 기본학교 자체에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공간에서 다수 시간을 잡아먹을 정도로 의미 없고 긴 질문은 반갑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기본학교에서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수학을 단 한철이라도 좋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와 비슷한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답은 한 번 즈음은 들어보았을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에서 찾을 수 있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라는 수학적 난제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다. 프랑스 수학자 피에르 페르마라는 사람이 던져놓고 가버린 난제다. 그런데 이를 증명한 앤드루 와일스란 수학자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모른다. 타원함수, 모듈성 정리를 바탕으로 명쾌하게 답을 낸 앤드류 와일스보다 답을 내지 않고 떠나버린 페르마만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질문이 더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여기에 드러난 셈이다. 다시 말해 주어진 질문에 대해 빠르게 답하는 것보다 길고 느리더라도, 정리되지 않았더라도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다.


    왜 기본학교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질문이 용인되어도 괜찮을까? 결국 자신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질문의 원천은 나 자신에 있다. 궁금증과 답답함이라는 감정을 솔직하게 용인한 다음 용기를 품었을 때에야 질문이 튀어나올 수 있다. 답을 알고 있어도 답이 도출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질문이 튀어나올 수 있다. 답과 답이 도출되는 과정을 이해하고 있어도, 답을 도출하는 또 다른 방법에 대해 궁금증을 품는다면 질문이 튀어나올 수 있다.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부조리함을 마주했을 때 시냇물처럼 휩쓸려 가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 감동을 하였음에도 무엇에 감동을 하였는지 모르고 눈물에 휩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엇에 감동을 하였는지 끊임없이 되뇌듯 질문하며 나를 이해하고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감동을 하고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나간 사람들만이 자신을 짓누르는 좌절과 역경을 견뎌낼 수 있는 내공을 갖추게 된다. 알베르 카뮈처럼 말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향한 질문을 던지기 위하여 단 한 줄의 명쾌한 명제가 아닌 많은 사람의 시간을 빼앗아 가는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물론 궁금증과 답답함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참 좋다. 하지만 이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내가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던지려면 일단 나의 궁금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다음에는 질문하고자 하는 핵심 키워드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개념들까지 들여다봐야 한다. 그다음 한 문장으로 축약하기 위해 고도의 논리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궁금증은 누구나 느낄 수 있고 질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궁금증을 품은 그 다음의 과정부터 상당히 어렵다. (* 적어도 나는 그렇다.)

    5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야자수에 열린 코코넛을 따기 위해 다양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코코넛을 따기 위해 질문을 던지지 않고 야자수에 올라타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야자수에 올라탄 것 또한 질문한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나무 끝까지 올라 야자수를 딸 수 있는지를 언어가 아닌 몸으로 나무에 질문한 것이기 때문이다. 뚱뚱한 사람은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답을, 악력이 부족한 사람은 힘을 키워야 한다는 답을, 지구력, 담력 등 사람마다 다양한 답을 낼 수 있다.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고유한 답은 정리되지 않은 질문이라도 던졌을 때에야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질문이라는 것은 꼭 모르는 사람이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오은영 선생님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분은 상담을 하실 때 내담자에게 질문을 자주 활용하시는 분이다.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프로이신 것도 있겠지만,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자신이라는 중심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은영 선생님이 가끔씩 내담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내담자의 입장에서 서운하게 다가올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의 방향은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는 구원처럼 다가올 때도 있다. 오은영 선생이 던진 질문의 끝에는 당신과 다른 존재가 있다는 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담자가 본인에게 던지지 못한 질문을 오은영 선생님이 대신 해주고 답까지 도출하여 떠먹여준 셈이다. 


    그래서 모든 질문은 괜찮은가? 그렇다. 질문은 나 자신이 수없이 쏟아지는 소음들에 떠밀려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나를 잃고 싶지 않다면, 나를 지키고 싶다면 5분 동안 중언부언하더라도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면 집으로 가는 길에 나 자신에게 또 질문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똑바로 질문을 하지 못했다면, 나라면 어떻게 질문을 했을 것인지, 나라면 어떻게 답변을 해볼 것인지 나 자신에게 질문해볼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질문은 괜찮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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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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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헌님의 댓글

    이수헌 아이피 (121.♡.217.65) 작성일 Date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모든 질문은 괜찮다는 점, 그리고 이는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이 요점이라 생각하고 글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우선, 모든 질문이 유용하고 필요하다고 일반화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상적으로 모든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 교육 환경에서는 여러 제약으로 인해 모든 질문을 중요하고 동등하게 다루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글에서 다룬 예시에 대해 간략하게 제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첫째,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고도의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특정 사례이며, 본 주제를 다루게 된 교육적 상황과는 직접 비교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둘째, 특정 질문은 개인의 성찰과 성장에 중요할 수 있지만, 수업이라는 약속된 상황, 이는 타인과의 상호작용, 학습 맥락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 상담과 교육은 서로 다른 접근과 지향점을 가질 수 있으며, 주로 1:1 상담 상황에서의 질문이 교육적 맥락에서 항상 적용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정리하면, 질문의 중요성과 긍정적인 관점은 이해하지만, 실제 상황에서의 적용과 다양한 조건 그리고 상황을 고려하는 균형 잡힌 시각도 필요하지 않을까 '의문'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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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현님의 댓글의 댓글

    이주현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댓글 잘 읽었습니다. 제 글은 기본학교라는 전제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첫번째는 고도의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특정 사례가 아닙니다. 질문과 답변의 위계 차이를 말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을 하려면 답변보다 질문이 먼저 앞서야 한다는 걸 말합니다. 최진석 교수님 또한 함평을 생각이 시작하는 곳이라 말씀하셨잖아요? 생각의 시작은 답변이 아닌, 질문이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두번째는 '수업이라는 약속된 상황'은 수업을 진행하는 사람이 괜찮다고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타인과의 상호작용, 학습 맥락의 중요성은 오은영의 선생님을 예로 이미 전달했습니다. 쏟아지는 질문으로 인해 수업의 맥락을 잃어버렸다고 느끼셨다면, 수업을 똑바로 집중하지 못한 셈입니다. 저는 쏟아지는 질문들도 받아 적으면서 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교수님이라면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 집중하여 들여다 봤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은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도 수업의 맥락을 잃지 않고 그대로 진행할 줄 압니다. 고로, 본인이 똑바로 정신만 차리면 문제 없습니다.
    세번째도 두번째 답변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은영 선생님은 내담자의 쏟아지는 이야기 속에서도 질문할 줄 압니다. 수업 시간에 쏟아지는 질문으로 인하여, 내가 수업의 맥락을 잃어버렸다면, 어쩌면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일 지도 모릅니다. 쏟아지는 질문의 내용인지 무엇인지 이해하고 나라면 어떻게 답변해볼 수 있는지 아는 것이 나 자신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적어도 저는 질문들을 받아 적으면서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정리하자면, 이수헌님이 제기하신 생각은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 의견에 반대되는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또는 '질문을 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접근했다면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사자의 발톱은 날카롭다.' 라는 말에 '사자는 사랑을 나눌 때 발톱을 감추던데? 전혀 날카롭지 않던데? ' 정도의 메시지입니다. 고ㅓ로 이 이상 대화를 할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 드네요.
    참고로  제 생각에는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기본학교'라는 전제를 달았으니까요. 중급학교, 고급학교였다면 그리고 다른 특수한 곳이었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생각이 시작되는 함평의 '기본학교'에서 던지는 생각의 시작인 '질문'은 그 어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생각에 꼬투리를 잡고 싶으신 거라면, 기본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새로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본인이 유지하던 균형만 고집하고 있으신 게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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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헌님의 댓글의 댓글

    이수헌 아이피 (121.♡.217.65) 작성일 Date

    우선 제 의문은 흥미롭지 않다고 비난하면서도, 기본학교 내 모든 질문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니 '모순'되어 보입니다.

    첫째, 사고를 시작하는 데 있어 질문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타당하지만, 질문과 답변 사이의 관계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답변과 질문은 상호의존적이며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입력이 있어야 양질의 질문도 가능합니다.

    둘째, 혹시 교수님께 직접 물어보았는지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고려사항이 아닌지 의문이 있습니다. 많은 질문이 있어도 강사가 괜찮다면 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지나치게 단순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과도한 질문이 다른 학생들의 학습 경험과 전체 수업 구조에 미칠 수 있는 잠재적인 영향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효과적인 교육을 위해서는 탐구와 커리큘럼 진행의 균형이 필요하며, 모든 질문이 성장과 균형에 건설적으로 기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셋째, 여러 질문으로 인해 수업의 맥락을 잃는 것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결과라고 가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다양한 학습 스타일과 과도한 질문이 교사와 학생 모두의 수업 흐름과 집중을 방해할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좁은 관점입니다. 기본학교는 누군가에게는 '기본'을 배우러 간 곳이기도 합니다. 외부에서도 기본으로 여겨지는 것이 지켜지지 않은 곳에서의 '무작위 질문'과 '학우도 고려하지 않는 성장'을 외치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졸업 후 원하는 성장을 하셨나요?

    Ps. 질문과 답변의 우위나 위계에 대해 페르마를 사람들이 더 많이 기억한다는 것이 예시로 적절한지도 의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으로 위계를 따질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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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경민님의 댓글의 댓글

    노경민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비난'이 아니라 '비판'입니다. 그럼에도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보기엔 흥미로운 질문이 아닌, 꼬투리 잡기 식으로 단정지어버린 답변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수헌님은 질문이 아닌 의문이었습니다. 의문과 질문은 같지 않습니다. 질문은 의문과 용기 그리고 자신이 함께 더해져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헌님의 댓글이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가 간과한 부분을 짚어, 사고의 확장을 할 수 있었다면 참 흥미로웠겠지만, 제가 했던 말을 반복해야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글을 똑바로 쓰지 못한 잘못도 있겠죠.) 그래서 흥미롭지 않았고 대화를 이어갈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답변을 해주셨는데, 대놓고 무시하면 예의가 아니잖아요?
    만약 질문을 통해 제가 간과했던 부분들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면 흥미로웠을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대화는 별로 흥미롭지 않습니다. 제 생각의 틀을 확장하는 게 아닌, 오히려 견고해지게 만드니까요. 이전 대화는 저에게 정말 가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이번 첫번째와 두번째도 흥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졸업 후 원하는 성장을 하셨나요?" 란 질문이 흥미로워 답해보겠습니다.

    첫째도 이미 글에 써놓았습니다. 야자나무로 예를 들었고요. 그리고 양질의 질문을 낼 수 있다면 상당히 좋지만 이는 생각보다 어렵다고 글에 써놓았습니다. 그래서 어설프더라도 정리되지 않더라도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고 말해놓았죠. 이번에도 반복하게 되었죠? 어쩌면 제 글이 문제인가봅니다.

    둘째도 첫째 답변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방식으로 답변을 이어나가보겠습니다.
    저번 주에 최진석 교수님과 짧게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시 최진석 교수님은 기본학교에서 나오는 모든 질문은 100점이라고 하셨습니다. 질문만 나와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질문 나쁜 질문은 없다고 하셨씁니다. 그래서 제 생각이 매우 단순해보였을 것입니다. 저는 기본학교에서 만큼은 교수님이 추구하시는 가치를 온전히 함께 하기로 결정했으니까요. 만약 교수님께서 기본학교에서 나오는 모든 질문이 100점이 아니라고 하셨어도 저는 왜 100점이 아닌지, 100점인 이유를 교수님께 질문을 던져 설득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게 저와 수헌님의 차이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야기하는 사람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면, 변화를 당하는 사람은 답변하는 사람입니다. 수업 분위기를 바꾸는 사람도 결국 질문하는 사람이죠. 만약 질문이 과도하게 쏟아지는 기본학교의 풍경을 변화시키고 싶었다면, 사무국장님이나 교수님께 직접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변화는 여기서 시작되니까요. 제가 질문과 답변의 위계 차이를 말한 이유이자, 이게 저와 수헌님의 차이입니다.
    물론 모든 질문이 성장과 균형에 무조건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질문을 통하여 잠시라도 수업의 분위기를 선도한 경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업에 안전하게 투자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들여다 보는 것이 이 기업이 해당 산업에서 1등을 한 적이 있냐 없냐, 선도한 적이 있냐 없냐잖아요? 질문도 다르지 않습니다. 수업 중 질문을 던지는 것은 수업 분위기를 전환 또는 선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경험이 있냐 없냐의 차이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학생들에게 리더의 탈을 쓰고 수업 분위기를 전환, 선도하겠다는 마음으로 공격적인 질문을 던져보는 용기를 가져보면 좋겠다며, 선동에 가까운 말을 했습니다.
    당연히 질문이 성장과 균형에 건설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장과 균형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교수님이 말씀 하셨듯이, 질문은 다음으로 건너가는 거잖아요? 건너가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닌, 건너간 다음에도 지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성장합니다. 반도체 산업을 선도하다 주춤하고 있는 인텔만 봐도 알 수 있죠. 고로 질문이 성장을 무조건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장의 시작은 결국 질문입니다.

    셋째 수업의 흐름과 집중을 방해하는 문제는 온전히 본인의 잘못입니다. 저는 글과 댓글에서도 기본학교에 적용되는 이야기라 하였으므로 좁은 관점이 아닙니다. 저는 모든 환경에서 문제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요. 오히려 제 글을 매우 좁은 관점으로 읽으신 것 같으신데, 어쩌면 제가 글을 똑바로 쓰지 못한 탓이겠죠. 만약 쏟아지는 질문들로 인하여 수업에 정말 집중하기 힘들었다면, 사무국장님이나 교수님께 질문을 던져 기본학교 시스템에 변화를 야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본학교의 '기본'과 외부의 '기본'을 동일하게 바라보시면 안 됩니다. 자유게시판에  "'옳은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 을 쓰시고도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게 참 아이러니 하네요. 어쩌면 질문을 던지지 않아서 그런거일 수도 있습니다. 이슬람 국가의 '기본'과 대한민국의 '기본'은 다르죠? 그리고 이를 통일시키려고 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없죠? 똑같습니다. 기본학교의 기본과 외부에서의 기본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좁은 시각으로 기본을 들여다 보시니 구분을 못하고 외부의 기본을 기본학교의 기본으로 오인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기본학교의 '기본'조차 제대로 정의를 내리지 못하시고 외부의 기본과 통일시키는 걸 보니 기본학교 출신은 아니신 것 같아,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기본학교의 기본은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는 게 질문이죠. 이게 기본학교의 기본입니다.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의 기본은 어떤가요? 내가 아닌, 강사의 이야기에 궁금해하는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모두가 질문이 아닌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합니다. 이게 차이입니다. 만약 수헌님이 기본학교 출신이셨다면, 기본학교 기본인 나를 궁금해하는 게 아닌, 외부에서의 기본을 추종하느라 최진석이라는 명사의 이야기에 궁금해하셨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이어서, 질문으로 인해 수업의 흐름과 집중에 방해가 되었다면 본인 잘못입니다. 그정도 집중도 못하면서 최소 3시간 이어지는 교수님의 수업 맥락은 어떻게 따라가시나요? 긴 서사로 이어진 고전문학은 제대로 읽을 수 있으신가요? 혹시 고전문학을 읽다가 집중이 안된다는 이유를 외부의 소음에서 찾으신 건 아닌지 의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집중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 집중의 동력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왜 집중을 못하지?" "왜 저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 "나는 왜 불쾌하지?" 와 같은 질문 끝에 그럴싸한 답이라도 내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메모라는 답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교수님의 수업의 맥락을 깰 수 있는 황당한 질문이 나와도 좋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시선을 엿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새로운 생각과 사고를 할 수 있는 걸 좋아하니까요. 물론 이런 질문이 싫은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교수님도 흥미롭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조용히 앉아서 교수님이 하는 말만 되뱉는 앵무새를 키우는 꼴이니까요.

    아~~ 드디어~~~ 제가 흥미롭게 여긴 질문에 대해 답할 시간이 왔네요. ^_^_^_^_^_^_^_^_^_^_^_^_^_^_^_^_^_^_^_^_ 사실 이런 말은 기본학교니까 말하지, 어디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원하는 성장을 하셨나요?" 답은 아니요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질문은 성장의 시작이고 성장은 개인의 역량입니다. 원하는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죠. 물론 누군가는 6개월 만에 성장을 할 수 있겠죠. 성장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참 미안한 답이지만, 이는 벼룩알에서 성체가 되는 정도의 성장일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답하자면, 제 답은 아니요입니다.

    p.s 이 부분 또한 이미 글과 댓글에 써놓았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하셨으니 다시 답변해보겠습니다. 모든 생각의 시작은 질문입니다. 답변은 질문 뒤에 항상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답변은 질문을 앞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질문과 답변 중 무엇이 선도적이냐 묻는다면 단연 질문입니다. 답변은 기존 생각의 틀 내에서 다시 되뱉는 거라면, 질문은 새로운 생각의 구조를 형성하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판을 짠 사람들을 기억하지, 기존의 판에서 더 좋은 답을 내놓은 사람을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죠.
    구체적인 현실과 추상적인 개념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쓰셨잖아요? 이에 빗대어 말하자면, 질문이 구체적인 현실이라면 추상적인 개념은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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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경민님의 댓글의 댓글

    노경민 아이피 (118.♡.238.33) 작성일 Date

    두번쨰 댓글에서 비난하셨다는 말이 마음에 걸려 다시 댓글답니다.
    제가 흥미롭지 않다고 말한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수헌님의 문해력이 0에 가깝다. 또 다른 하나는 수헌님이 제 생각을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0에 가깝다. 일단 저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를 떠올린 이유는 첫번째 댓글을 보면,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 "항상 적용되는 게 아니다." 와 같은 의견이 주류였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글에 썼던 내용을 다시 읊어드려야 하는 상황이 그려졌으니까요.

    만약 문해력이 0인 사람에게 첫번째 댓글에 대한 답을 하려면, 중학교 수학 도형 파트에 나오는 '닮음'과 '합동'이란 개념부터 다시 설명해야 합니다. 저는 닮았다고 말한 것인데, 수헌님은 합동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꼴이니까요. 이를 바탕으로 비유도 추가로 설명해야 합니다. 비유는 전체의 일부를 빗대어서 표현한 것이라고요.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 란 말은 나올 수 없다고 설명해야겠죠? 그런데 저는 수헌님에게 이를 설명할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습니다. 저 언어 9등급이고 수리영역도 9등급이거든요. 결국 부족한 가르침을 이어나가다 중요한 알맹이는 다루지 못하고 시간만 버리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수헌님이 저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신다는 점이죠.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0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자기 만의 틀 안에 갇혀 있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나요? 수헌님의 댓글에 제가 답변한 내용들을 보면 대부분 제가 썼던 글에 있는 내용을 다시 읊지 않았습니까? 이건 제자리 걸음 밖에 안 됩니다. 시간낭비죠. 그래서 의미가 없다. 흥미롭지 않다고 말한겁니다. 물론 문해력이 0인 사람에게도 똑같이 읊어줘야 하는 상황이 그려지는데요. 수헌님은 그정도가 아니라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견지망월이란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저는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대화하고 있는데, 수헌님은 제 손가락만 보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달을 볼 수 없거나, 달을 보고 싶지 않아서 제 손가락만 보고 논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첫번째 댓글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게 다소 섣부른 판단일 수 있고 무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댓글을 보니, 죄송하게도 제가 나름 제대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물론 세번째 댓글이 달릴지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또 모르겠죠? 무튼, 제가 그래서 "의미가 없다.".  "흥미롭지 않다.",  "대화를 이어갈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와 같은 날선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절대 비난이 아니고 비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으로 느껴지셨다면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수헌님은 저보다 더 많이 아실겁니다. 써오신 글을 보더라도 저보다 지식이 많으면 많았지 부족하지 않거든요. 수헌님의 댓글을 보면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고 그냥 태클을 걸고 싶은 쪽으로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흥미롭지 않다.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의미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면 또 반문이 올 수 있겠죠?
    "그러는 당신은 나를 이해하려고 했냐?"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는게, 기본학교라는 전제를 거듭 강조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곳이었다면 수헌님의 생각에 적극 동의하죠.

    고로 저는 비난이 아니었고요. 문해력이 0인 수헌님 또는 글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는 수헌님을 향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후자를 향해 비판한 것이죠.

    추가로 최진석 교수님께서 새말새몸짓 기본학교의 기본 가치를 바꾸시지 않는 한, 누군가가 기본학교를 향해 질문을 던져 변화를 야기하지 않는 한, '기본학교에서의 모든 질문은 괜찮다.' 라는 명제는 항상 옳습니다. 수헌님은 불평만 했을 뿐, 이 명제에 변화를 야기하지 못하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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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헌님의 댓글의 댓글

    이수헌 아이피 (172.♡.94.42) 작성일 Date

    우선 ‘보편적 가치’와 ‘맹목적 믿음’의 차이에서 오는 간극은 메울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처음 제 글에서 ‘비판’을 썼다가 ‘비난’으로 바꾼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비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난(非難)’이란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責)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비판(批判)’이란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을 뜻한다.’

    또한 질문과 의문의 사전적 의미는 다르나, 언급하신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질문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본인의 태도가 모순적이기에 ‘좋아하고 믿고자하는 것’을 ‘보편적으로 옳은 것’과 혼란스러워하는건 아닌지 질문드린 것입니다.

    저는 당신의 흥미에 부합하기 위해서 글을 쓴 것도 아니고, 본인이 시작한 글을 이어나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애초 저 사안도 제가 먼저 시작한 것이었고, 추가적으로 당신의 반대 답변을 듣기 위해 댓글을 단 것입니다.

    본인 글이 문제라며, 말씀하고 계시지만 실로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저를 비꼬는 것 같습니다. 독자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글이 장황하고 두서없으며, 근거가 빈약합니다. 정말 문제를 모르시는 것 같아서 적어봅니다. (근거에 교수님 말씀말고 본인 생각을 또렷하게 피력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의견를 맹목적으로 따르기 위해 기본학교에 간 것도 아니며, 그 ‘기본’에대해 자신이 정할 것이지 문자 그대로 따를 생각도 없습니다.

    말씀을 따르던 따르지 않던 지지부진한 말다툼보다는 결국 ‘변화된 행동의 총량’으로 따지면 될 일입니다. 또한 제가 수업에 집중했는지 안했는지를 왜 본인이 판단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직접보셨습니까? 지례짐작은 자유지만, 대체로 글에서의 판단이 그런 방향인 것 같습니다.

    기본학교의 기본과 외부의 기본이 다른 것은 알고 있습니다. 위계가 있다면 함평에서 배울 기본이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지요.

    하지만, 제가 말한 외부의 기본은 보다 쉽고 타인과도 어울릴수 있는 기본 중에서도 ‘기본’입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주석이라도 달아드릴까요?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다가 그 외부의 간단한 기본도 무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질문이었으며, 또한 수업 내용이나 말씀을 되뱉는 앵무새는 누구인지는 본 게시글과 댓글만 봐도 알 것 입니다.

    저는 본 글 작성자를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저는 내용과 관련된 의문이나 내용만 다루고자 했으나, 왜 구분짓고, 위계를 정하고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모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걱정마세요. 당신이 처음은 아닙니다.

    시간 낭비라 말씀하셨지만 정성들여 장황하고 두서 없는 글을 작성해준 것, 그것도 모순적이네요.

    하지만 둘 다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니 여기서 그만 두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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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경민님의 댓글의 댓글

    노경민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이 글은 시작이 <기본학교에서는 모든 질문이 괜찮다.> 이지만, 제가 나열해놓은 생각은 '기본학교에서 모든 질문이 괜찮은 이유'가 아니라, '질문이 가치있는 이유'입니다.
    수헌님의 첫번째 댓글의 첫째, 셋째를 보면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 "항상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질문이 가치있다> 라는 것에 대한 이유를 나열한 것입니다. "질문이 이렇게 가치있고 기본학교도 질문을 중요하게 여기니, 기본학교에서 만큼은 수업 중에도 자유로운 질문이 이루어져야 한다." 라고 말한거죠. 교육현장에서 모든 질문이 옳다는 근거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나 오은영 선생님에 대해 논한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수헌님의 처음 댓글을 보면 글을 완전히 잘못 읽으셨거나, 비판을 헛 짚으셨거든요? 어쩌면 제가 두서없이 장황하게 작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죠? 처음에는 제 글을 읽지 않고 비판만 한 걸로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엄청 실망을 했었고 흥미가 없다고 말했던 거였습니다. 그런데 댓글을 계속 보니.. 생각이 달라지네요.

    첫줄은 저도 동의합니다. 댓글만 보면 수헌님은 보편적 가치, 맹목적 믿음의 차이를 현실에서 적용시키질 못하고 있으니까요.
    보편적 가치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항상 달라지는 것이고요. 결국 비용편익과 규범적 사고방식 간의 대립입니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저는 규범적 사고방식이고 수헌님은 비용편익에 가깝죠. 그런데 수헌님처럼 규범적 사고방식을 향해 공격하려면, 외부의 규범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기본학교의 규범을 놓고 다뤄야 한다는 점입니다. 외부의 규범을 가져오는 순간 오류의 시작이에요. 같은 모양의 도형을 놓고 비교해야지 완전히 다른 도형을 놓고 비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수헌님이 하고 있는 게 딱 그거입니다. 계속 외부에서도 지켜지는 기본에 대해 말하고 있잖아요? 이거 자체가 오류입니다. 제가 이걸 계속 말하고 있는데도 바뀌지 않고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죠? 그리고 제가 여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죠? 그래서 제가 시간낭비라고 말한겁니다.

    수헌님의 비용편익 관점은 실제 적용하기가 복잡하죠. 그래서 법을 보더라도 조항이 계속 달라 붙거나 계속 바뀌잖아요? 예를 들어서, 동등한 가치의 절대적인 원칙 간의 충돌이 발생할 경우에는 어떻게 비용편익을 계산해서 더 나은 것을 선택할것인지 결정하기 상당히 난해합니다. 혼돈의 카오스로 빠지는 셈이에요. 그러니 학교라는 곳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규범을 따르는 게 오히려 비용편익상 이점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제 생각의 커다란 틀이기도 합니다. 물론 글에는 따로 드러내지 않았지만요.

    비난과 비판의 구분을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이실 정도의 유리멘탈인거 같으니까요.

    질문과 의문은 사전적으로 다른 의미죠. 그런데 동일하게 보려고 하시는 게 아니러니 하네요. 이정도면 문해력에 문제가 있거나, 정신승리에 도가 트이신 것 같습니다. '충분히' 라는 말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과 '의문'은 다른 단어죠? 그래서 맥락에 따라 동일하게 적용될 수가 없어요. 물론 질문의 폭을 넓혀서 해석한다면 동일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는 방향으로 의문을 제기했을 때겠죠. 하지만 수헌님의 의문은 다른 가능성을 제기하지 않으셨죠. 비판으로 끝나는 의문이었습니다. 수헌님의 질문과 의문은 다릅니다.  제가 이거까지 설명을 해드려야 하나요? 그래서 시간낭비라고 했습니다.

    저는 '좋아하는 것을 믿고자하는 것'을 '보편적으로 옳은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전 계속 같은 답을 명료하게 드리고 있거든요. 저는 항상 전제를 달았죠? 기본학교에서만 적용된다고. 하지만 수헌님은 어떻죠? 외부에서의 기본이 기본학교 뿐만 아니라 다릇 곳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하죠? 이는 하나의 가치를 모든 것에 적용시키려고 하는 순간, 좋아하는 것을 믿고자하는 것과 다르지 않겠죠? 각양각색의 상황에서 '보편적으로 옳은 것'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절대 무오류성을 가정하는 오류를 저지르는거죠. 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말을 아끼겠습니다.

    저는 제 흥미에 부합해달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준 낮은 대화를 하게 된 점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에요. 그러니 반대되는 답변의 퀄리티도 낮을 수밖에 없죠. 수헌님은 나무의 기둥을 만지지 못하고 나뭇가지만 만지고 있잖아요? 마지막 댓글도 그렇고요. 나무를 꺾으려면 기둥을 쳐야지, 나뭇가지를 꺾으면 되겠습니까? 결국 수헌님이 잘못 짚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서로 의미없는 공허한 말만 오간 꼴이죠. 그런 상황에 대한 푸념일 뿐입니다.

    제 글이 문제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비꼰게 아니에요. 전 앞서 '흥미롭지 않다', '시간 낭비다.' 같은 말을 솔직하게 표현했잖아요? 그러니 제 글이 문제라고 하는 것 또한 비꼬는 게 아니라, 저 자신을 인정한겁니다. 문맥을 그렇게 강조하셔놓고 이정도 문맥을 읽지 못하신다면,,, 문해력에 문제가 있으시거나.. 비난으로 받아들이실까봐 더 길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튼 저는 그 자리에서 생각나는 것들을 두서 없이 장황하게 썼으니까. 제 글이 문제인거 인정하고요. 배려도 부족했죠. 수헌님의 첫번째 댓글도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셨잖아요? 제가 글을 똑바로 쓰지 않아서 그런거겠죠. 물론 지금도 장황하하게 쓰고 있어서 뜨끔하고요.
    앞서 설명했듯이 기본학교에서의 기본에 대해 논할 떼는 교수님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분이 교장이시자 이사장이시니까요.  우리가 공공갈등을 논할 때 상위법, 헌법을 중심에 놓아야지, 내 주관적인 생각을 중심에 놓을 수 없잖아요? 모두에게 적용되는 가치가 침해당하지 않으려면, 제 주관적인 입장을 내놓을 게 아니라, 정해진 규범을 바탕으로 생각을 입장을 내놓아야 하잖아요? 제가 앞서 언급했듯이 규범적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러니 저는 규범을 만든 자의 의견에 기반하여 생각을 전개하는 게 맞죠. 학교 교칙이 옳다고 말하려면, 학교의 교칙을 중심에 놓고 말해야지, 혼자 동 떨어진 말을 하면 됩니까? 그리고 제 생각은 이미 글에 피력해놓았습니다.
    근거가 빈약하다고 하셨는데요. 제가 보기엔 수헌님 독서량이 빈약하신 거 같습니다. 제 글은 단순 주관적인 생각을 담아낸 일상 에세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이유를 달아놓은거죠? 그런데 그런 에세이 글에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하실건가요? 근거로 빵빵하게 채워진 일상 에세이 책 보신 적 있나요? 물론 그런 에세이 글도 있긴 하죠. 근거를 고집하시는 걸 보면, 에세이는 많이 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실에서는 질문이 자주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라고 말했을 때, 이유와 근거 중 무엇을 물어야 할까요? "교육 현장에서는 모든 질문이 나와야 교육적인 효과가 있어." 라고 말했을 때는 이유와 근거 중 무엇을 물어야 할까요? 이건 근거겠죠? 제가 이걸 가르쳐드려야 하나요? 제가 흥미롭지 않게 여긴 이유, 시간낭비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이걸 또 비난이고 모욕이라고 하실건가요?
    비난이다, 모욕이다 하지 않길 바랍니다.

    기본학교의 기본은 본인이 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맹목적 믿음에 빠지는거죠. 연세대학교에서 기독교 수업은 필수로 듣죠? 연세대학교에 갔다는 것은 그 커리큘럼과 가치를 졸업할 때까지 맹목적으로 따르겠다고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나는 불교인데ㅠㅠ" 이러면서 툴툴거리실건가요? 꼬우면 자퇴하면 됩니다. 기본학교도 다르지 않습니다. 본인이 교수님의 커리큘럼과 가치를 따르겠다고 선택해놓고 그 가치는 따르지 않고 본인의 기본을 직접 정해놓은 다음 툴툴거리시는 게 참 아이러니하네요. 그 기본은 본인의 삶에서 선택해야 할 사항이죠. 이것까지 제가 가르쳐야 하는건가요? 이런거는 수헌님 정도여도 충분히 잘 아실거고 제 글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신 것으로 보면, 1시간 강의도 충분히 할 수 있을거에요. 그런데 꼬투리나 모순만 잡으려고 하니까 이렇게 되는겁니다.

    '변화된 행동의 총량'으로 따지면 된다고 말했는데요. 이건 계산할 수 없습니다. '변화된 행동의 총량'을 계산하는 수식이 있나요? 없죠? 근거도 없이 그냥 던져놓은 말이죠? 그리고 계산하는 방법이 있어도 각 사람마다 다릅니다. 각자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변화를 야기하는 상수는 다르니까요.
    그럼에도 이해하려 노력해보겠습니다. 일단 '변화된 행동의 총량'으로 따지면 된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네요. 그러니 저 나름대로 해석하겠습니다.
    <질문을 통해 '행동의 총량' 이 긍정적으로 변하였느냐> 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근데 이건, 제가 앞 댓글에서도 원하는 성장을 하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명확하게 계산하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각 사람마다 성장의 속도는 다 다르잖아요? 그러면 이 총량은 언제를 기준으로 계산할건가요? 졸업 직후입니까? 아니면 수업 이후입니까? 죽기 직전인가요? 물론 여기까지 생각해보지 않으셨으니 모르시겠죠.
    참 아이러니 하게도 저에게 근거가 빈약하다고 이야기 해놓고 본인은 그 어떤 근거도 없고 답이 도출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없는 애매한 답을 내셨따는 게 웃음포인트네요. 있지도 않은 근거를 문맥과 맥락으로 이해하길 바라는 구걸처럼 다가옵니다.
    만약 수헌님이 <변화된 행동의 총량>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소통을 하며 더 나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이끌어내고자 따로 노력하셨다면, 상당히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꼭 인정하고 싶습니다. 아니라면 취소할게요.

    그리고 저는 수헌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수준 낮은 댓글만 보고 판단한 겁니다. 게시판에 쓴 글을 보고 수준이 낮다고 하지 않았잖아요?

    기본학교의 기본과 외부에서의 기본은 완벽하게 분리해야 합니다. 맥을 따질 게 아니에요. 계속 '모순'을 이야기하면서 논리를 들먹이면서 본인의 '모순'은 맥으로 이해해달라며 정신승리 하시는 게 참 안쓰럽습니다. 제가 계속 반복했던 말이지만 기본학교의 기본과 외부의 기본은 구분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쪽은 기본학교에서의 질문에 대해 논하고 있는 거잖아요? '타인과 쉽게 어울릴 수 있는 기본'은 기본학교 에서의 질문과 관계가 없습니다.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는 것은 보편적으로 옳은 것이죠? 그런데 예식장에서 수영복을 입는 것은 보편적으로 옳은 게 아니죠? 같습니다.
    그러므로 '보편적 옳음'에 대해 논하려면 환경과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중요하죠. 고로 기본학교라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쪽은 외부에서나 적용되는 '보편적 옳음'을 기본학교에 들이대셨죠. 이건 수영장에서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았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사찰에 있는 승려들이 도시의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인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가락질하는 것과 같다고요.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다가 그 외부의 간단한 기본도 무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질문> 이 문장이 조금 부족하죠?  무엇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지 모르잖아요? 그리고 <그 외부의 간단한 기본>에 대해서도 정의하셔야 합니다. 이건 수헌님이나 알지 누가 아나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붙잡아놓고 말해보세요. 외부가 대한민국인지, 전 세계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인지 아니면 강연장에 적용되는 건지, 수업 또는 질문의 태도인지 모르잖아요?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이런 거 말씀하시나요? 제대로 말해야죠. 무튼 제 나름대로 해석 하겠습니다.
    여기서 건강하게 대화하려면 가장 먼저 질문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하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나뭇가지가 아니라 나무기둥을 칠 수 있으니까요.
    질문인 것 같지만 장황하게 떠들다가 조용히 끝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건 질문이 아니라 그냥 혼잣말인거죠. 또는 의문형식으로 끝난다면 이 또한 질문이 아니라 비판에 가깝습니다.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다가 그 외부의 간단한 기본도 무시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제가 답한다 "수업 중 모든 질문은 괜찮다. 하지만 수업 중 하고 싶은 혼잣말이나, 의문과 비판은 질문이 아니니 다른 시간에 하는 게 맞다." 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저는 수헌님이 던진 질문에 답하려고 열심히 타협한 것이지. 이 또한 솔직히 어렵습니다. 의문과 질문을 구분해서 입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거든요.

    저도 수헌님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낭비, 흥미롭지 않다고 말한 게 모욕처럼 느껴졌나요?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수헌님은 나무의 기둥이 아닌 나뭇가지만 치고 있었거든요. 나뭇가지를 친다고 해서 나무가 쓰러지나요? 아니죠. 진짜 건드려야 하는 것은 나무의 기둥입니다. 물론 나무 기둥에 닿기 위해 무성한 나뭇가지를 쳐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헌님은 마지막 댓글까지도 나뭇가지만 만지셨죠?
    모욕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수준 낮은 대화가 오간 것에 실망하여 강하게 비판했을 뿐입니다. 지금도 이상황이 정말 정말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이 실망스러웠는지 솔직하게 말했잖아요? 모욕, 비난이 아니라 비판인겁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짚었으니까요.
    사전적 의미 좋아하시니까 모욕 뜻 그대로 읊어드릴게요. [모욕 - 깔보고 욕되게 함.], [욕되다 - 부끄럽고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럽다.] 제가 한 말이 그렇게 부끄럽고 치욕스러웠나요? 제가 수헌님의 무지함을 들춰낸 게 부끄럽고 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판을 욕되게 하는 걸로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질문과 의문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보편적 가치'는 커녕, 상황 자체도 인식하지 않고, 비유와 예시의 차이도 모르고, 근거와 이유의 차이를 모르고, 모순만 찾으려 들고, 다른 단어여도 맥락상 동일하다 정신승리하고, 상대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으면서 본인은 빈약한 근거를 던지고 납득하길 바라는 마음을 모두 묶어서 비판한거죠. 이런 게 첫 댓글에 다 묻어나 있었어요.

    저도 수헌님처럼 기본적인 개념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 말꼬리만 잡으며 정신승리하는 사람들을 상대한 게 처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댓글만 보고 바로 알아차린거죠. 시간 낭비라는 걸.
    수헌님도 아시겠지만,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이 있잖아요? '내 인식이 옳음은 해당 공동체 구성원들에 의해 갖춰진 합의에서 찾을 수 있다.' 이거 잖아요? 다시 말하자면, 특정 집단에서 이루어진 합의가 합리성을 갖는다는 거죠. 합리성을 만들어나가는 건, 짧은 시간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눠서 도출된 합의를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거잖아요. 수헌님은 대화의 시작보다 빈틈 찾기, 모순 찾기 정도였습니다. 이건 대화 자체가 안 됩니다. 초등학생식 어쩔티비 저쩔티비 정도에 불과합니다.

    제가 시간 낭비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황하게 글 쓴 게 모순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상대방의 메시지를 잠시라도 품어보려 노력했다면 '모순'이라는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게 저와 수헌님의 차이이고요. 시간 낭비라 말한 이유죠. 다시 말해서, 대화에 큰 의미가 있는지, 내가 배울 수 있는게 있을지 모르겠다는거죠. 물론수헌님에게는 매우 큰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더 나은 주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구분짓고 위계를 정하게 되었네요. 그런데 이건 온전히 제 기준이니까요.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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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경민님의 댓글의 댓글

    노경민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위 글과 댓글은 기본학교 3기인 제가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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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우영님의 댓글

    장우영 아이피 (211.♡.181.17) 작성일 Date

    2024 최진석의 말 1월 13일자 내용이 흥미로워 공유드립니다.
    "질문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질문을 했다는 사실이 의미 있을 뿐, 질문은 옳고 그름처럼 확고하게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인류 역사의 창조적이고 새로운 것은 모두 엉뚱한 질문에서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