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90년대생들의 비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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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택이는 하루 일정을 마치고 함께한 동지들과 점심 식사를 한 뒤, 카페로 향했다. 그러나 카페는 출근길 지하철처럼 빈 자리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그렇게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까지 대화의 꽃을 피웠다. 영택이는 오고가는 대화에 지루함을 느꼈을까, 아니면 호기심의 길을 택했을까. 그는 옆자리 동지와 책에 대해 이야기를 잠시 나누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다.
"저는 치욕을 견디지 못해서 항상 도망쳤던 것 같아요," 영택이는 고백했다. 그의 동지는 영택이를 확신에 찬 듯한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도망친 거 자체가 치욕이 아니었을까요?"
영택이의 마음에는 그동안의 확고했던 생각에 금이 갔다. 그 균열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재미를 숨기며, 그는 대답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망치는 것과 책임지는 것 모두 치욕이라 생각했어요. 선택지는 두 개 밖에 없었습니다. 둘 중 치욕의 경중을 따지자면, 도망이 덜 치욕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택이는 패스트푸드점에서의 짧은 대화를 통해 잠시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영택이의 과거는 핵티비스트 모임으로 활동하면서 정체성과 내적 갈등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리고 이념에 사로잡힌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적정 기준을 세워야 했다. 요즘의 예로, 패스트푸드점에서 시위하는 동물보호 운동가나, 미술관에서 소란을 피우는 환경보호 운동가처럼 비판의 대상이 되어 치욕스러운 상황에 놓이는 걸 피하고자 했다.
핵티비스트 모임의 다른 멤버들이 사이버 공격의 대상을 찾는 데 몰두했던 반면, 영택이는 공격 후 발표할 성명문으로 대중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집중했다. 공격 대상 선정은 그에게 있어 뒤따르는 문제였다. 이러한 고민의 무게는 단순 활동의 일부가 아니었다. 영택이의 모임을 향한 지지와 후원금에 대한 부담감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부담감이 멤버들을 향한 불만, 활동에 대한 고민을 불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겜돌이 영택이에게 이 활동이 게임처럼 재미만을 추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다.
영택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복잡하고 모순적인 가치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섹스라는 과정을 거쳐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섹스 영화를 금기시하는 이중적 태도는 깊은 고민을 안겼다. 반대로 살인은 현실에서 비극으로 여겨지지만, 살인을 다룬 영화는 카타르시스의 원천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 속에서, 영택이는 섹스 영화가 범죄 영화 보다 더 가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은 핵티비스트 모임의 활동과도 연결되었다. 영택이와 동료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아동 포르노 유포자들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성명서를 작성하여 설득하기 위한 과정에 혼란에 빠졌다. 어떤 섹스 동영상까지를 윤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가 자유를 추구하는 우리가 허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마다 차이가 있으나 가장 보편성에 가까운 16세 미만까지를 아동 포르노로 분류해야 하는걸까. 그렇다면 15세 364일에 한 섹스 동영상 유포자는 우리가 공격하고 16세 1일부터 하는 섹스 동영상은 자유로 허락해야 할까. 아니면 어려 보이면 그냥 공격해야 하는 것인가? 이러한 고민은 영택이가 핵티비스트 활동을 하면서 성명문을 작성할 때마다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판단하기엔 지나치게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영택이는 이러한 복잡한 사회적, 윤리적 문제들을 고민하며, 그의 활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명문을 어떻게 작성할지 심사숙고했다. 그는 단순히 사이버 공격 대상을 찾거나 공격의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달랐다. 그들은 공격을 통해 위상을 드높이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택이도 위상을 높이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다만 그에게 성명문은 단순한 후속 조치가 아닌, 핵티비스트 모임의 의도와 목적을 명확히 전달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는 핵심 수단으로 여겼다. 어쩌면 자신의 행동이 치욕스럽게 변질되지 않길 바라는 강한 마음이었을 지도 모른다.
사이버 공격은 전략 수립부터 실행, 성공까지 긴 과정을 요구했고, 때로는 2~3개월이 소요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실패도 많았으며, 그 결과로 성명문의 중요성은 종종 간과될 수 있었다. 영택이 역시 비트코인으로 후원금을 받기 전까지는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사이버 공격의 성공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영택이는 후원을 받은 이후로 모임의 목적과 방향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이버 공격의 성공이 단순히 기술적인 성과를 넘어, 어떻게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변화를 촉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이는 단순히 사이버 공격의 타겟을 선정하는 것 이상의 문제로, 사이버 활동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후원에 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택이는 핵티비스트 모임 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그의 고민과 사고방식은 재미와 관심을 더 중요시 여기던 핵티비스트 모임의 활동 방향에 특별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영택이의 핵티비스트 모임 멤버들 중 멤버A의 활동과 가치관은 가장 선명하고 강렬했다. 멤버A는 영택이의 핵티비스트 모임이 단순히 사회적 이슈를 공론화하는 것을 넘어, ISP 업체 장악과 같은 활동을 통한 더 큰 명성을 추구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영택이의 핵티비스트 모임이 해커 범죄 집단으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익명성을 소중히 여기던 영택이었지만 상당히 시끄러웠던 멤버A가 거슬려 그의 신상을 알게 되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멤버A는 20대 후반의 남성으로, 미국에서 조카 두 명을 부양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특히 그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은 이유는 1980년대 유명한 해커, MENTOR의 글과 가치를 따르고 있던 앵무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당시 MENTOR의 글, 특히 그의 해커 선언문은 사이버 공간과 해커 커뮤니티에서 베스트셀러에 가까웠다. 아니 어쩌면 고전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선언문은 특히 해커 문화와 정체성에 관한 내용으로, 많은 해커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당신보다 똑똑하다는 것. 그러니 당신은 나를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문구는 해커들이 겪는 사회적 오해와 낙인에 대한 반항적인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영택이가 보기에 멤버 A는 이 선언문을 자신의 정체성과 활동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이 특별하고 똑똑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때때로 그를 앵무새처럼 보이게 했고 멤버A는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의 학습 의욕과 열정은 인정받을 만했다. 당시 그의 리눅스, 유닉스, 오픈소스 네트워킹에 대한 깊은 지식을 들여다 보면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택이는 멤버 A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오만함과 일면적인 시각에 대해 경계했다. 영택이와 멤버 A는 해커 커뮤니티 내에서 서로 다른 접근 방식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함께 했다. 단순 자신의 형을 떠오르게 하는 연민만은 아닐 것이다. 정치적인 성향과 추구하는 가치의 방향이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택이가 10대 청소년에서 20대로 넘어간 시기였을까. 당시 핵티비스트 모임은 북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를 대상으로 사이버 공격을 가했다. 이 국가는 인터넷 사용에 대한 엄격한 검열을 시행하고 있었으며, 당시 1,000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행위였다. 영택이의 핵티비스트 모임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검열을 우회할 수 있는 웹사이트 스크립트를 개발하고, 그 국가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협력하여 테스트하고 성공적으로 실행했다. 이러한 노력은 해당 국가의 국민들이 자유롭게 정보에 접근하고, 외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활동은 해당 국가에 입국하지 않고도 서방 언론에 해당 국가의 상황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택이는 이 과정에서 서로의 가치를 공유하는 위키리크스의 창립자와 더 가까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추후 영택이와 틀어졌지만.
영택이의 핵티비스트 모임은 해당 국가의 정부 웹사이트를 호스팅하고 있는 네임 서버가 두 개 밖에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렇게 영국에 있는 웹 호스팅 서버를 장악하여 해당 국가의 서버로 초당 막대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는 권한을 가로챘다. 그렇게 영택이는 그 국가의 정부 웹사이트를 다운 시켰고, 고위 공무원들의 이메일을 해킹하여 내부 정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는 영택이의 핵티비스트 모임의 가치와 목표에 부합하는 활동에 가까웠다. 영택이가 지금까지도 긍정적으로 회상하는 순간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해당 국가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국가의 정부는 외부에서의 사이버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인터넷 요청을 모두 막는 방법을 도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해당 국가로 입국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당시 핵티비스트 모임은 이러한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고자, 그 국가 내에 있는 협력자를 찾기 시작했다. 자국의 변화를 원하는 운동가가 스스로 지원하였고 영택이는 그에게 프록시 역할을 맡기게 되었다. 당시 영택이는 이 일을 빠르게 시행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상대가 앵무새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진실된 사람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영택이는 그 지원자의 말을 부모님의 말보다 크게 신뢰하여 즉각적인 행동으로 이어갔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영택이는 그 지원자에게 평소 인터넷 공간에서 보이던 모습처럼 거짓말의 탈을 쓴 사회공학적인 접근을 하지 않았다.
영택이는 지원자에게 컴퓨터 제어권을 넘겨주는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하였고, 지원자의 컴퓨터 제어권을 얻었다. 덕분에 해당 국가에 입국하지 않고도 그 국가의 인터넷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당시 제어하고 있던 컴퓨터의 낮은 사양으로 인해 작업의 속도는 상당히 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영택이의 핵티비스트 모임은 해당 국가 대통령의 공식 웹사이트에 접근하여 이를 온라인에서 사라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해당 페이지에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메시지를 남겨놓고 그 국가를 농락했다.
영택이는 이러한 중대한 성과를 마치고 나서성명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사상가 노엄 촘스키를 떠올리며 성명서를 작성했으며, 그의 메시지는 노엄 촘스키의 심오한 사고와 가치관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반영했다. 그러나 영택이의 공격으로 인하여 프록시 역할을 맡은 멤버가 체포되는 불상사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영택이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영택이는 지원자에게 언제나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으나, 결국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해당 국가로 가서 자수할 수도 없는 자신의 모습이 미웠다. 영택이는 여기서 둘 중 하나의 치욕을 선택해야만 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해당 국가로 가서 처벌 받는 치욕과 약속을 외면하는 치욕이다. 결국 영택이는 그나마 가벼운 약속을 외면하는 치욕을 선택했다. 다행인 점은 해당 국가의 대통령은 결국 물러났고, 인터넷 검열 수준도 낮아졌다. 이러한 결과는 영택이와 그의 모임에게 커다란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이후 영택이와 멤버들은 중동 지역의 여러 국가들에서 인터넷 검열을 행하는 정부를 연이어 공격하며 그들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이 과정은 영택이의 치욕을 잠시 잊게 만들어주었다.
영택이의 핵티비스트 모임의 활동은 단순 기술적 능력을 과시하는 게 아닌, 국제적인 인권과 정보의 자유를 촉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활동하는 찐따가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는 활동가로 보이게 된 계기였다. 어쩌면 그들의 활동이 널리 지지를 받고, 한 달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12,000달러의 후원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보여주었던 목적과 방법이 대중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지지와 후원은 영택이 본인의 활동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돈이 없이도, 혹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것의 가치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달았다.
영택이는 이와 동시에, 후원과 지지 속에서 부담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평소 받아보지도 않았던, 기대하지도 않던 대중의 기대와 신뢰는 그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택이는 핵티비스트 모임의 활동과 대외 이미지에 대해 점점 더 예민해졌다. 아이러니 하게도 핵티비스트 모임의 다른 멤버들은 위험을 감수하며 더 과감한 해킹 활동을 지속하려 했지만, 영택이는 이러한 방식에 의문을 가졌다. 그는 그들의 열정과 진정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방법이 지나치게 위험하고 책임감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처럼 재미를 추구했다면 영택이는 후원금의 가치와 명분에 집착하느라 도중에 활동을 그만두었다. 어쩌면 더 큰 치욕을 피하고 싶어서 도망간 것일지도 모른다.
영택이는 집으로 돌아가, 영국의 중대조직범죄청(Serious Organised Crime Agency) 소속의 화이트 해커 출신이자, 현 칼럼니스트 겸 작가라고 소개한 자와 몸이 좋지 않아 도중에 끊어졌던 인터뷰를 다시 하게 되었다.
아래는 인터뷰 내용을 최대한 요약한 내용이다.
Q. 활동 중 실현한 가치 중 가장 의미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A. 사회적 해방에 가깝다. 우리는 전통적인 사회운동가와 조금 다른 형태를 취했다. 전통적인 사회운동가들은 특정 산업 유형에 속한 노동자라면, 우리는 방구석에서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며 비생산적인 활동을 지속하는 잉여, 찐따였다. 하지만 우리는 나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투쟁했다. 난 이러한 가치가 조금 더 현대적이고 매력적이고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요즘은 ESG 경영이란 말이 나오면서 상당히 익숙한 개념이 되었지만 말이다.
과거 봉기를 일으켜 자신의 지도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통제권을 특정 대상에게 부여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대신 투쟁하여 통제권을 부여할 권리를 선물한 것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귀족, 왕족, 백성, 시민도 아닌 약자의 편에 싸우는 외계인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Q. 당신의 활동을 외계인으로 비유한 이유에 대해 더 듣고 싶다.
A. 외계인으로 비유한 것은 우리의 독특한 위치와 역할 때문이다.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이나 특정한 사회적 계층에 속하지 않는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와는 다른 생각과 방식으로 활동했다. 대부분의 전통적 노동자들은 가정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그들의 가치관과 투쟁은 종종 가정의 필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나? 이러한 구조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 방식에 제한을 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는 자신의 일터에서 낮은 지위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보상을 가정에서의 권력을 재확인하는 방식으로 순환된다면? 이런 순환은 사회를 고착화시켜 병들게 만드는 바이러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의 가정집에서 그려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폐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우리는 사회의 전통적인 구조나 계급에 속해 있지 않았다. 이는 기존의 사회적 순환에서 벗어나, 부조리함에 대해 더 강력하고 자유로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 사회적 구조나 권력 관계에 얽매이지 않았던 이유, 사회의 악순환을 향한 도전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라 생각한다. 내부인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외계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물론 내가 멤버들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Q. 외계인 같은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이라 여겼는가?
A. 평등이다.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면 생각과 행동의 변화가 발생하여, 궁극적으로 평등한 사회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으나, 지식의 습득과 개인의 지적 해방은 공평하지 않다. 지식의 습득이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활용하여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개인의 실천에 달려있다 있다.
나는 모든 글을 배움의 도구로 활용하고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람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지성의 징후가 피어난다면, 세계를 재정의할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람들을 진실된 사람으로 여긴다. 난 이들을 높이 평가하며,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소수의 프로보다 다수의 아마추어들의 실천을 더 이상적으로 여긴 이유다. 아마추어들의 적극적인 활동이야 말로 진정한 평등과 지적 해방을 위한 길을 열어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어린 나의 상상력에 불과하다.
Q. 당신도 자신만의 지성의 징후가 드러난 적이 있는가?
A. 아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드러난 적이 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지성의 징후는 비생산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자신의 색깔을 선명하게 하는 일을 하루 20시간 가량 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자신만의 색깔이라고 하면, 창조적이고 답습하지 않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시작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최초의 글을 작성할 때를 떠올려보면 글자와 문장을 따라서 적는 필사가 아니던가? 필사로 모여진 모든 글들은 결국 내가 배운 것들의 총체다. 하지만 여기에 머무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면 결국 번역해야 하지 않나?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통 감각이다. 공통적인 감각을 느끼려면 나 자신만 들여다 보는 우월감이 아닌, 모두가 동등하다는 평등의식이 자리해야 한다. 평등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다른 생각들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습관이 익숙해진다면 앞서 언급한 지성의 징후가 드러나, 스스로의 해방, 확장으로 이루어져 자신만의 색깔이 드러날 거라 생각한다. 난 이 분야에 대해 특별히 연구하지 않았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Q. 아주 아주 아주 짧게 지성의 징후를 느꼈다고 하니 묻겠다. 그것은 어떻게 피어나는가?
A. 지성의 징후란, 자기 성찰과 자기 의식의 노력을 통해 피어난다고 생각한다. 노력의 과정에서 개인은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존재하는 이유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집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므로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과 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그래야 집단으로부터 결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래야만 스스로를 해방, 변화시키는 지성적 징후가 피어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의 나는 지성의 징후가 피어나기는 커녕 시들어버린 상태다.
Q. 지성적 징후를 통해 집단에서 해방되어, 자신만의 색깔이 선명해졌을 때 독선으로도 변질될 수 있지 않나?
A. 그렇다. 자신만의 색깔을 특권화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앎을 바탕으로 형성된 특유의 색깔을 특권화하지 않고 인터넷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공유하려 노력했다. 인터넷 세계이라는 세계에서 24시간 내내 불특정 다수와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앎이란 단순 학자들이 수행하는 앎,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방식의 근거 역할을 하는 앎에 국한되지 않는다. 학자가 수행하는 앎을 초월한, 일반인들의 지위와 가치 향상을 일으킬 수 있는 휴머니즘적 가치에 가깝다.
추가로 상당히 유치한 이야기지만, 이건 어렸을 때의 내 생각이다.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지만 모두가 건강에 대해 공부하여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의사가 된다면 어떨까? 이건 의사와 일반인 간의 계급 차이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모두의 가치가 상승하여 더 나은 삶을 그릴 수 있게 되는 시발점이다. 우리의 앎 그리고 우리의 색깔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하며 나누려고 한 이유다. 어쩌면 우리가 공유하려고 했던 앎이란 휴머니즘적 가치는 현재 AI가 품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난 이제 할 말이 없다. 그럼 이만 가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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