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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 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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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경팔이 (218.♡.110.45)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849회   작성일Date 24-06-16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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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든지 재미있어야 한다. 재미가 없는 것은 1분 이상 지속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재미란 무엇인가? 일단 몰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게임에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엄마의 등짝 스매싱 공포마저도 잊게 만드는 강한 몰입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닌가? 강한 몰입을 더 오래 하려면 예측 불가능성이 따라와야 한다. 예측 가능함의 연속은 따분함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반전의 반전을 불러일으키는 실시간 전략 게임이나 높은 난이도의 액션 RPG 게임을 즐기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내가 옛날에 살던 곳에는 육상 트랙이 가까이 있었다. 그곳에서의 조깅은 정말 재미있었다. 그래서 매일 저녁 3~5km를 달렸다. 족저근막염이 걸렸을 때만 빼고. 저녁 7~8시 즈음 트랙에는 체조하는 사람부터 가볍게 걷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트랙 한가운데에는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기도 했었다. 나는 트랙을 열심히 돌며, 그들을 추월하며 몰입감과 예측 불가능성을 극복하는 재미를 즐겼다. 


    앞사람을 한 바퀴 차이로 제칠 때마다 "힝~ 한 바퀴 차이쥬?", 또다시 앞서가면, "힝! 두 바퀴 차이쥬?", 재차 앞서가면, '나.. 어쩌면 전생에 올림픽 챔피언이었을지도?' 같은 다양한 망상 하며 강한 몰입을 하게 된다. 그러다 누군가가 나를 앞질러 가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추격한다. 그를 앞지르자마자, 20m 정도 더 달린 뒤, 그 사람에게 제쳐지기 전에 이젠 운동을 다 마쳤다는 듯 재빨리 트렉에서 도망친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까지도 승자가 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는 트랙이 없다. 대신 길고 긴 산책로가 있다. 여기 사람들은 다양하다. 자전거를 타는 이들, 걷는 이들, 조깅하는 이들. 그러나 이곳에서는 추월하는 재미가 없다.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항상 누군가가 내 앞에 있다. 항상 남들보다 늦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전거가 나를 앞질러 가면, 나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때론 전동 킥보드라도 타고 그들을 가볍게 추월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산책로에 전동 킥보드가 있을 리가... 산책로에서의 조깅은 트랙에서의 조깅보다 예측 불가능성은 높지만, 몰입감은 확실히 떨어진다. 


    트랙을 달릴 때의 나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이 길고 긴 산책로 위에서 나는 단지 하나의 숫자, 느린 이동 수단에 불과하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마치 치밀하게 계획된 듯 흘러간다. 각자의 속도, 각자의 궤도, 그리고 나는 그 사이를 헤매는 불완전한 존재. 이런 건 재미가 없다. 내 지성의 레벨이 낮아서 그런지 그 어떤 몰입도 재미 요소를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운동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혈액은 제대로 순환하지 않고, 뇌는 활력을 잃는다. 가장 효율적인 운동은 역시 하체 운동이다. 왜냐하면 하체에 근육이 제일 많으니까. 그래서 아파트 비상구 계단 오르기를 시작했다. 일단 문 열고 나가면 바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상구 계단 오르기는 재미가 없다. 추월할 상대가 없어 몰입감은 제로다. 같은 풍경이 반복되어 예측 불가능성도 낮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같은 회색 콘크리트 벽, 금속 난간. 계단은 그저 계단일 뿐, 그 안에는 어떠한 변주도, 예상치 못한 전환점도 없다.


    하지만 나는 운동을 해야 한다. 그래야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갈 테니까. 그러면 일률이 높아지고 시간에 쫓기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계단 오르기에서 재미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파트 단지가 아닌, 주변의 낯선 아파트 단지의 비상구 계단을 오르기로 결심했다. 주위 아파트 단지는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원한다고 해서 들어갈 수 없다. 여기서 예측불가능성이 추가된다. 


    요즘 아파트 단지는 공원처럼 조경이 잘 조성되어 있다. 그래서 낯선 아파트 단지에서 공원을 산책하듯 즐기며, 굶주린 멧돼지처럼 주위를 은밀하게 두리번거린다. 누군가가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순간, 나는 사냥감을 발견한 표범 마냥 호다닥 달려가 함께 들어선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비상구 계단으로 향한다. 그렇게 나는 낯선 아파트 단지의 비상구 계단을 천천히 오른다. 


    이 낯선 공간에서 나는 마치 탐험가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각 층마다 다른 비밀을 품고 있을 것만 같은 계단. 나는 매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풍경과 만나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다. 내가 발견한 아파트 비상구 계단 오르기의 재미다. 


    비상구 계단을 오르다 보면 방화문이 활짝 열려있는 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연히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은 묘한 재미를 준다. 마치 탈북을 하려다 김정은 딸에게 들킨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 "주애야.. 아니 조선의 샛별 여장군님? 이건 아무것도 아닙네다~ 저는 길을 잃었습네다~" 때로는 부실공사로 유명한 건설사의 아파트 비상계단을 오를 때도 있다. 그때의 나는 마치 국토안전관리원이 되어 하자를 검사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무리하게 계단을 과도하게 오르다 보니 몸에서 신호가 왔다. 내 앞 허벅지가 저릿저릿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재미있다. 저릿저릿한 허벅지를 참고 계단을 오르는 과정은 마치 시가전에서 허벅지에 총탄을 맞고, 적의 눈을 피해 아파트 비상구 계단으로 도망치는 군인이 된 듯한 긴장감과 짜릿함을 느끼게 하거든. 


    각 계단마다 다른 층의 문을 지날 때마다, 나는 또 다른 세계의 장면들을 마주한다. 어떤 층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다른 층에서는 저녁을 준비하는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지금의 나는 아파트 계단 오르기가 가장 재미있다. 계단의 반복된 오름과 내림 속에서 나만의 리듬과 재미를 찾아가는 재미, 내 몸을 단련하고, 정신을 맑게 하며, 머리가 핑핑 잘 돌아갈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 


    목표는 하루에 300층 오르는 건데, 점점 오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아마 허벅지에 총탄을 맞아서 그런 거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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