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견뎌, 찬란함을 확인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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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산행.
새벽 산행은 두려움을 견뎌, 찬란함을 확인하는 길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모험가들에게는 새벽 산행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내가 느낀 새벽 산행은 그냥 산을 오르내리는 게 아니다. 산속에 내려앉은 어둠을 견디며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곳에 도달한 뒤, 찬란함을 약속하는 여명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찬란함을 확인했다면 조용히 산에서 내려간다.
어둠을 견디는 건 쉽지 않다. 이는 술자리에서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보잘것없는, 주위 사람들 험담으로만 채워놓느라, 어둠이 내려앉은 진짜 자신의 내면과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어쩌면 자기 안에 내려앉은 짙은 어둠을 파해질, 어둠을 감당할 용기가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 이야기만 하기 바쁜 술자리에서는 대화를 꽃피우는 게 아닌, 테이블 위의 안주와 술잔을 빠르게 비우고 자리를 뜨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어둠을 견디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미간에 주름이 진 사람이 아닌, 미간이 뽀송뽀송한 아이일 지도 모른다. 40대 아저씨의 말보다 4살짜리 아이의 말에 더 큰 용기와 과감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4살짜리 아이는 어둠에 갇혀 있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드러낼 줄 안다. 이를 감추느라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못났는지, 사회가 얼마나 문제인지를 말하는 아저씨들과 다르다. 오로지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파헤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둠을 견디는 사람은 어떤 길로 갈 것인지 예측할 수 없어 흥미롭다. 하지만 어둠을 견디지 못하고 밝은 곳으로 향하는 사람은 어떤 길로 갈 것인지 에측이 가능하여 식상하고 따분하다. 술상의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기보다 꼬맹이들과 대화하는 걸 선호하는 이유다.
알베르 카뮈는 어둠 속에서 자신 만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흥미로운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아니다. 어쩌면 어둠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앞으로 나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라는 인물은 정해지지 않은 길을 향해 묵묵하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살인이라는 잔혹한 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매우 당연한 것에 물음표를 던지는 건, 자기 스스로가 어둠을 향해 나아가 여명을 밝히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마치 길거리에 있는 모든 간판을 따라 읽으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아이처럼 살겠다는 다짐일 지도 모른다. 사전이 정해놓은 '살인'을 따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살인'이 무엇인지 정의하여 여명을 찾아 나서겠다는 다짐.
어둠이 불러오는 불안정함을 견딜 것인가 아니면 도중에 눈을 감고 피할 것인가. 아니면 밝은 곳으로 도망칠 것인가. 뫼르소는 불안정함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카뮈의 작품을 보면 이런 사람들이 행복을 약속받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여명과 같은 존재가 되었따.
찬란함을 약속하는 여명을 붙잡으려 해도, 어둠은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결국 인간에게 어둠이란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는, 밝은 곳으로 도망쳐도 끝까지 따라오므로 견뎌내야만 하는 대상이다.
최진석 교수님은 대한민국에 제3 지대가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제3 지대는 분명히 있다. 제3 지대가 없다면, 제3 지대라는 개념 자체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제3 지대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둠 속에 감춰져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어둠 속에 감춰져 있는 제3 지대로 향하려는 사람이 없는 것일 지도 모른다. 제3 지대에 잠시 발을 딛었다가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어 다시 밝은 곳으로 도망친 것일 지도 모른다.
어둠이라는 불안함을 견뎌낼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찬란함을 약속할 여명을 발견할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대한민국의 제 3 지대를 밝힐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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