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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시원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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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민석 (223.♡.249.19)
    댓글 댓글 4건   조회Hit 22,047회   작성일Date 24-01-14 21:24

    본문

    나는 눈먼 아이였다.
    상실된 나의 마지막 조각이 문제가 되었을 때,
    절망의 전능함을 발견하곤 했다.
    조그만 행복이라도 되찾기 만하면 행복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휘페리온 > 중, 프리드리히 휠던린

    이따금씩 시에 대한 찬미가 들려온다.
    더군다나 하나의 도덕적 명령으로써 인생의 여러 주머니 중 하나에 보관될 만한 것으로 여겨지곤 하는 것 같다.
    여기서 '주머니'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몸에 지니곤 있지만 몸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는 의미로는 가능할 것이다.
    즉,'주머니에 지니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하다.'
    자신의 전이해와 더불어 여러 변수에 따라 그 깊이가 다름을 의미한다. 모두가 그런 식으로 대상을 받아들인다. 누군가는 존재가 흔들리고 누군가에게는 말장난과 같을 것이며 또 누군가에는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 지점에서 즉, 시에 대한 사회적 평가나 개인적 평가를 논하는 지점에서 위의 시에 다시금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란다. 시인이 어떤 존재자의 위치에 서있는지를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시가 탄생의 중간자인 시인은 허구속에서, 환상속에서 존재를 견디고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병에 걸린 육체를 짐지고 있음에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세계와 스스로가 합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불안을 견디고 있으며 그 불안을 통해 광기에 빠진다.
     불안은 대상이 없으며 이 세계에 분위기와 같다.
    보통은 불안을 대상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 대상에 있어서 주의를 돌리거나 그것을 제거한다면 다시금 그런 '기분나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다시말해, 인과의 법칙을 통해서 삭제되어야만하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시인은 이것에 가장 큰 의의를 두고 아니, 이것에서부터 가장 큰 결함을 보고 그것이 제거될 수 없음을 직감하는 자다. 언제나 자신과 외부세계에 비틀림에 주저앉고 그 속에서 헤메며 그곳에서 발견하는 무엇을 쫓아 마주보며 글로 표현해내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언어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허구속에 삶을 살고 있는 지를 누구보다 잘 알며 그것이 외부세계에 실현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따라가는 자. 이것은 동시에 창조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환상임을 알고 자신의 환상을 견디는 자라야만이 생명의 언어, 시원의 언어, 최초의 기표를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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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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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주현님의 댓글

    염주현 아이피 (121.♡.30.150) 작성일 Date

    긴장감을 놓지 않고, 수양하는 삶을 이어나가는 것..
    앞에 서자. 중간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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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윤경님의 댓글

    조윤경 아이피 (118.♡.14.249) 작성일 Date

    "절망의 전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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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머니쥐님의 댓글

    주머니쥐 아이피 (218.♡.110.45) 작성일 Date

    오~~ 주머니라는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배우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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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훈님의 댓글

    이창훈 아이피 (211.♡.4.136) 작성일 Date

    기본학교 수업 때 '포이에르 바하'라는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프리드리히 휠덜린'도 못지않게 멋지네요!
    다음에 어디서 만나면 반가움에 귀 기울 것 같습니다.

    세계는 생각과 다르고
    생각은 말 또는 글과 다르기에
    말과 글로 생각하는 이상 불안할 수밖에 없나 모르겠습니다.

    이 불안에 둔감해지게 마련이지만
    몇몇 예민한 자(시인)들은 그 불안이 꺼지지 않아
    단어라도 조합해 스스로의 불안을 설명해 내는데,
    그 결과물이 주변인의 불안까지 도로 깨우는 게 아닐까요!